금융산업의 애증의 역사
이탈리아 단어 중에 banco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걸터앉는 벤치 또는 탁자를 뜻한다. 여기서 파생된 말이 영어의 bank 이다. 우리가 돈을 맡기고 빌리는 은행을 의미한다. 옛날의 은행은 탁자에 앉아서 영업한 것이다. 현대 이탈리아어로 은행은 banca 이다. 그리고 banca rotta 라는 말도 있다. 직역하면 부서진 탁자라는 뜻이다. 이 말이 영어로 발전한 것이 영어의 bankrupt 이다. 부도나다 또는 부도난 이란 뜻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근현대적인 은행의 시초가 이탈리아이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이 이탈리아 베니스의 고리대금업자를 둘러싼 이야기인 것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시에나의 광장 피아짜 델 캄포를 조금 지나면 Via Banchi di Sopra 거리가 나타난다. 직역하면 위쪽 탁자들의 길이다. 여기서 banchi 는 앞서 얘기한 banco 의 복수형이다. 뭔가 은행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을 조금 걷다 보면 Banca Monte dei Paschi di Siena 라는 건물이 나온다. 그리 크지 않은 4층 정도의 건물이다. 로컬 가이드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 은행이야말로 세계 최초의 은행이라고. 나는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그건 최초의 근대적인 은행은 플로렌스에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하면 메디치 가문이고, 메디치 가문 하면 플로렌스가 아닌가?
나중에 체크해보니 그도 맞고 나도 맞았다. Banca Monte dei Paschi di Siena 는 현존하는 은행 중 세계 최초의 은행인 것이다. 1472년에 설립되어서 아직도 우리 눈앞에 버젓이 존재한다. 메디치 가문의 은행은 이보다도 80년이나 앞서 세워졌지만 100년 후에 없어졌다. 아직까지 생존했더라면 세계 최초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근대라는 말을 빼면은 얘기가 좀 다르다. 고대 그리스에도 은행 비슷한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은행은 오랜 시간 동안 인류와 함께했다.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건물을 짓는 데 도움을 줬다. 심지어 국가나 왕들하고도 거래했다. 큰 전쟁의 뒷배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금융은 신체의 혈액과 같다. 돈이 혈액처럼 돌지 않으면 자본주의라는 신체는 유지가 안 된다. 이 금융의 기능을 대표하는 것이 은행이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은행은 종종 경제시스템을 뒤흔드는 경제위기의 주범이 된다. 따라서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다. 문제는 최근 들어 위기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히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혹시 지금의 은행시스템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한번 돌아보자. 이것은 1930년대 대공항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였다. 그리고 위기의 한가운데 은행이 있었다. 물론 더 깊이 파고들면 미국 중앙은행도 공범이다. 과도한 통화팽창으로 은행의 무모한 대출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하기야 중앙은행도 일종의 은행이다. 세계 금융위기의 도화선은 CDO라 불리는 채권 상품이다. 서브프라임이라 불리는 낮은 등급의 주택담보대출에다 신용을 보강한 파생상품이다. 서브프라임 대출은 주로 저소득층에게 제공된다. 그래서 디폴트 즉 채무불이행의 위험이 크다. 이는 높은 금리로 보상된다. 파생상품이란 기초자산의 가격변동을 기반으로 하는 2차 금융상품이다. 예를 들면, 주식 가격변동을 기초로 하는 파생상품이 주식 선물과 주식 옵션이다. 신용을 보강한다는 말은 낮은 등급의 채권을 담보력 향상을 통해 높은 등급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그럼 CDO는 어떻게 낮은 등급의 서브프라임을 기초자산으로 해서 자신의 신용을 보강했을까? 먼저 서브프라임대출을 많이 모아서 풀을 만든다. 그리고 이 풀을 디폴트 위험정도에 따라서 높은 등급, 중간 등급, 낮은 등급의 세 종류의 CDO 채권으로 재분류한다. 그리고 등급에 따라 금리를 차별화한다. 낮은 등급의 CDO는 상당히 높은 금리를 제공한다. 높은 디폴트위험에 대한 대가이다. 높은 등급의 CDO는 당연히 금리가 상대적으로 낮다. 그래도 예금금리나 국채금리보단 높게 책정된다. 기초자산인 서브프라임대출 자체의 금리가 높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렇게 하여 원래 낮은 등급의 서브프라임대출에서 높은 등급과 중간 등급의 CDO를 파생해 낸 것이다. 이들은 중수익 저위험 상품으로 둔갑해 인기를 끌게 된다. 이에 은행들은 공격적으로 기초자산인 서브프라임대출을 늘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CDO를 찍어냈다. 저소득층은 수월해진 서브프라임대출을 이용해 주택시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주택시장에 버블이 생겨났다. 그러나 버블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택 가격이 하락하자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이 원금과 이자를 연체하기 시작했다. 기초자산인 서브프라임대출에서 현금흐름이 막히니 파생상품인 CDO에 대한 이자 지급도 끊기게 된다. 그래서 CDO의 디폴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높은 등급의 CDO도 디폴트가 급증한다. 이것도 역시 서브프라임대출을 기초자산으로 했기 때문이다. 곧 CDO 투매가 일어났다. 이곳에 많이 투자한 은행들에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베어스턴스나 리먼 브러더스 같은 은행들을 그냥 방치했다. 그래서 그들은 부도가 났다. 하지만 계속 방치하기엔 금융기관들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게 엮여 있었다. 또 다른 파생상품 CDS를 통해서였다.
CDO를 많이 보유한 금융기관들은 CDS라는 금융 보험계약을 통해 위험헷지를 했다. CDS 계약의 판매자는 보험금을 받고 CDO 부도시 원리금 지급을 약속한다. AIG 같은 초대형 금융사들이 CDS 판매자로 나섰다. 그래서 CDO의 디폴트가 급격히 늘자 CDS를 판매한 금융사도 유동성 위기를 맞게 된다. AIG 같은 초대형 금융사의 부도는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한다. 결국 미국 정부는 백기를 든다.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구제금융을 실시한다. 동시에 통화의 양적완화를 통해 금융시장에 무제한의 유동성을 살포한다. 이런 조치는 자본주의국가 미국에겐 상상하기 힘든 사회주의적 정책이었다.
이때 시작된 양적완화는 무려 10년 이상을 지속한다. 이 과정에서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과잉 유동성과 초저금리 상황이 생겨난다. 그리고 초저금리는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에 심각한 가격 왜곡과 버블을 일으켰다. 또한 직간접적으로 유럽 금융위기, 중국 부동산 위기, 세계적인 물가 폭등의 불씨를 제공한다. 정치적으로는 금융 엘리트를 대변하는 월스트리트와 일반 국민을 대변하는 메인스트리트의 대립을 일으켰다. 이는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역사적 관점에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세계사에 한 획을 긋는 거대한 사건으로 후대에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는가? 직관적으로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이다. 고위험의 서브프라임 대출이 결코 저위험의 파생상품으로 변신할 수 없다. 은어로 표현하면 'garbage in, garbage out' 이다. 즉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 세계 금융위기는 'garbage in, gold out' 즉 쓰레기를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착각에 기인한 사건이다. 그리고 CDS 같은 파생상품은 진정한 가치 창출을 하지 못한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거래상대방은 반드시 같은 금액의 손실을 보게 구조화되어 있다. 절대로 양쪽이 윈윈이 될수 없다. 이런 성격의 파생상품이 금융시장이 주력이 된 세상이다. 금융시장의 또 다른 은어를 빌리면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이 요즈음 현상이다. 많은 금융기관은 '파생의 파생의' 상품들을 계속 개발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 하고 있다.
한국에서 수시로 문제를 일으키는 ELS도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높은 확률로 예금보다 조금 높은 금리를 준다. 하지만 한 번의 이벤트로 원금을 크게 잃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ELS보다 이들의 기초자산에 투자하는 게 더 유리하다. 이론상 모든 확률을 고려한 평균 기대수익률은 ELS가 기초자산 수익률보다 항상 낮다. 왜냐하면 ELS에는 금융기관의 수수료와 파생 거래에 동반되는 추가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예금금리보다 높은 수익률에 원금손실이 없는 안전한 상품이라는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식과 채권시장의 선물과 옵션도 마찬가지이다. 한쪽이 이득을 보면 거래 상대방은 반드시 그만큼 손해를 본다. 원래의 개발 의도는 기초자산인 주식과 채권의 가격 하락을 방어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파생상품 거래 중 상당 부분이 투기성이다. 많은 개인투자자도 파생상품 거래에 참여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실제로는 카지노게임을 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카지노는 하우스만 돈을 버는 구조이다.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일찍 간파한 현인이 있다. 바로 워런 버핏이다. 그는 세계 금융위기가 일어나기 수년 전에 이미 경고했다. 그는 복잡한 파생상품을 '금융시장의 대량살상무기'라고 불렀다. 특히 금융위기의 주범인 CDS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 그의 혜안에 경의를 표한다. 그에 관한 다른 유명한 일화도 있다. 2008년 초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헤지펀드와의 수익률대결이다. 자신은 S&P500 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펀드에 투자하고 헤지펀드 매니저는 5개의 베스트 헤지펀드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백만 달러를 걸고 누가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지 내기했다. 장기투자의 대가답게 10년에 걸친 대결이다. 9년 만에 헤지펀드 매니저는 수건을 던졌다. 그때까지 연수익률이 7%대 2%로 역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헤지펀드는 다양한 자산을 가리지 않고 투자한다. 파생상품도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이들의 현란한 투자테크닉은 가장 본질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인덱스펀드도 이기지 못한 것이다.
현실 경제에서도 똑같다. 무에서 유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없다. 미국이 드디어 이 원리를 깨달은 것 같다. 이것은 지금 트럼프 정부의 경제정책의 근간이다. 실물 부문에서의 생산 없이 금융, 인터넷, 반도체 디자인, 서비스산업에만 의존해 온 소비경제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다. 지금의 미국 경제시스템은 국가 간의 분업과 공조가 깨지면 지속되기 힘들다. 불행히도 이런 조짐이 최근 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존의 시스템은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종이에 불과한 달러화로 다른 곳에서 생산된 재화를 구매하고 소비해 왔다. 나름 무에서 유를 창출해 온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이 권력을 잡았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도 결국은 트럼프 정부와 비슷한 정책을 펼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트럼프 정부보단 좀 더 세련된 방법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따라서 누가 정권을 잡든 상관없이, 앞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미국을 접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