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난다. 지금보다 몸이 정확히 절반 밖에 되지 않았을 무렵, 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사람은 왜 다 죽어?, 그리고 다 죽는 거면 왜 살아?”
정말 궁금했다. 아마 책에서 3단 논법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였던 것 같다. 그땐 인간이라면 다 죽는다는 것이 3단 논법의 전형적인 예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솔직히 아버지의 대답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별로 인상 깊지 않았나 보다.
죽음이 무서웠다. 알지 못하기에, 알려진 것도 없고, 알 수 도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옛날 위인들 중 몇몇은 죽음이 두려워 영생을 원하다 죽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죽음이 두려워 비밀도, 친구도, 사람도, 나라도 파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죽음은 그 본질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본능적으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인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해서.
그래서 사후 세계에 관한 사람들의 상상력이 대단한 것 같다. 물론 수 도 없이 많겠지만 대충 정리하자면.
천국과 지옥, 그리고 때로는 연옥, 지옥에서 죄를 재판받는 모습, 레테의 강물, 케로베로스, 불구덩이, 사탄,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연습생이 되는 모습(인간 이후의 형태가 3이었나 4였나 그랬을 것이다)처럼.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천국의 형태보다 지옥의 형태를 더욱 많이 들은 건 기분 탓일까. 무언가를 바라는 세뇌 덕일까.
아무튼 그런 행위들을 보고, 듣고, 읽고 있으면 벽이 없는 방에서 눈을 가린 채로, 무엇이라도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그 손짓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물론 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팬이지만, 사후 세계를 알려고 한다는 그 행위의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 허우적거림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미지의 것들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니까. 그 속성으로 인해 발전이 되어왔다는 것 또한 안다. 그 허우적거리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앉아서 무기력하게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다를 바가 없다.
나에게도 역시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다. 다만 모두가 피하려 노력하는 것은 안다. 하지만 죽음을 꼭 항상 기피의 대상으로 치부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죽음을 열렬히 환영하는 지지자는 아니다.
생각해 보면 죽음에 대한 질문을 아버지에게 한 이후로, 나름대로 죽음이라는 녀석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방법은 간단하다. 나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한 번씩 상상하는 거다.
그래서 난 중학교 때부터 죽음이라는 녀석과 가까워지려 했다.
나의 죽음, 친구들의 죽음, 가족들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제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죽음이란, 사라짐이고 존재의 소멸이었다.
하지만 웃긴 것은 이 죽음이라는 녀석의 가치가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이기적 이게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했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뉴스에서 마주치는 순간들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물론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공통적으로 슬퍼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현상은 비단 ‘지인인지 아닌지’ 뿐만이 아닌 ‘직계인지 방계인지’, ‘촌수의 높고 낮음’ 등 생각보다 현실적인 기준들에 의해 슬픔의 정도도 연봉 테이블처럼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겠지만, 10년 전 얼굴이나 한번 떠오를까 말까 하는 동창, 친구의 친구, 가족의 친구 등은 그렇게 슬퍼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위로의 말이야 하겠다마는.
그리고 죽음이라는 녀석은 당연한 소리지만 예상하지 못할 때 찾아온다. 그 아무도 죽음을 예상하지 못하기에 당연한 소리지만, 그 범위를 조금 더 확대하자면 갓 태어난 영유아기의 아이들조차, 당장 2분 42초 뒤에 죽을 수 도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은 사람을 보내주기에는 3일은 잔인할 정도로 짧다. 왜 3일인 걸까. 3일장이라는 건 알지만, 3일 동안 죽은 이와의 추억들, 그 과거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는 것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짧다. 이 감정이라는 것에도 그 무게가 있어서 소화시키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다. 3일은 소화불량이다.
그래서 내가 상상한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놈은 예측 불가능, 단기, 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물론 틀리겠지만)
그래서일까 어렸을 적, 감정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특히 어머니한테서. 어머니는 아주 가끔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았는데, 솔직히 적어보자면 별 감흥이 없었다. 그 죽음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감정을 자극하려는 시도 같았고, 애초에 난 자주 가족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기에,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죽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면 되지”
물론 혼나긴 했다.
그렇게 죽음을 가까이 생각했다. 예측 불가능하다는 그 특징 덕에 나이에 맞지 않게 주변인들의 죽음에 대해 늘 상상했고 늘 슬펐고 늘 울지 않으려 대비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생각이 스쳤다. 나는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 정확한 본질은 알 수 없을 테지만, 난 나의 죽음을 슬퍼하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란 출발 시간도, 그 출발 방법도, 소요 시간도, 도착지도, 도착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미지로의 여행’이다. 물론 우리가 존재하는 이 현실 속을 기준으로는 죽음은 끝이지만 미지의 세계 속에서 죽음이란 일종의 시작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물론 ‘~일거야, ~이지 않을까 ‘라는 말은 100% 추측성의 말이지만, 난 그렇게 믿고 싶다. 어쩌면 이 과정 역시 죽음을 부정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도 모른다면 난 나의 죽음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어찌 보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도 나만의 자유이지 않을까 싶다.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그래서 웃고 싶다. 나의 죽음 앞에서. 무섭고 떨리고 두렵겠지만 그래도 여행을 시작할 때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불안하긴 하지만 내심 설레기도 할 테다. 재미없을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여행의 시작에서조차 그 힘듦에 빠져나오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유감이다)
그런 여행이 아닐지도 모르는 여행을 하기 위해선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의 울음소리보다는 웃음소리가 듣고 싶다. 나의 장례식은 장례식이 아니었으면 한다. 오히려 나로 인해 많이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현실의 것들은 현실의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나는 이미 현실을 떠났으니까. 그렇게 나를 아는 사람들끼리 만난다면 나와 마주쳤던 그 짧은 순간들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이왕이면 최대한 재밌고 우스꽝스러운 것들로 가득 찬 순간들이었으면 한다. 그렇게 한번 나를 통해 웃으면 그걸로 된다. 그리고 그 웃음이 장례식장을 가득 채웠으면 한다. 그러면 나 역시 그 웃음을 내 마지막 순간으로 삼고 미지로의 여행의 원동력으로 삼을 것이다.
(죽고 나서 나를 그리워하며 우는 건 날 슬퍼지게 할 뿐이다. 슬퍼지고 싶지 않다. 새로운 여행이라면 그 여행은 웃음으로 시작하고 싶다)
아 이제는 알겠다.
인간은 다 죽는다. 그러면 왜 태어날까?
신이 만들어서? 우주에서의 돌연변이라서? 나와 유전 정보를 매우 비슷하게 가져가는 자식들을 낳고 그 씨를 퍼트리기 위해?
다 정답이겠고 다 정답이 아닐 것 같다.
적어도 우리가 태어난, 우리가 허락된, 순간들로 가득 찬 이 짧은 생에서,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들을 찾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죽는다면 참 많은 것들이 그리울 것 같다.
너무나 흔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들.
나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바람.
나를 스치는 풀잎들.
눈이 시릴 정도로 따가웠던 햇빛.
냄새나는 지하철.
벤치에 앉아 거꾸로 봤던 세상.
내 가족들.
너무나 강렬해 중독되어 버린 것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
내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려는 나의 소중한 사람.
그 모든 것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볼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