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그 사전적 정의는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짐. 또는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함’이다.
우리는 너무 흔하게 영원을 염원한다.
영원하지 못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도 영원을 바란다.
그리고 그 영원은 대게 좋은 것들에 한정적이다. 그 누구도 가난, 절망, 잃어버림, 뒤쳐짐을 영원히 희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영원이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순간과 장면들이 변화라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끝없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이 절대적 영원에 대한 염원은 그 역사가 깊다.
하도 영원을 주창해서 이제는 순간만큼 그 무게가 가벼워져버린 지금 노래들의 가사부터
옛 진시황이 영원한 삶을 위해 수은을 마셨던 것까지
그 역사가 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영원하고 싶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나의 상황들이 영원했으면 했다. 지금의 내 겉모습, 가족들, 건강 상태, 젊음, 체력, 힘, 사랑하는 사람들.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잃어버리는 게 두려웠고 잃어버렸을 때의 무기력함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란 인지 과정의 점진적 소멸이어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죽기에는 한번 더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느끼고 싶고, 있고 싶은 것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다. 그래서 영원의 맹목적 지지자들이 이해가 되었던 적도 있다.
너무 두려웠던 탓이었을까. 덕이었을까. 일종의 자기 합리화였을지도 모르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죽음이 인지 과정의 소멸이라면 죽은 그 직후에는 우리는 인지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 (사실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만 )
그렇다면 인지 과정이 사라진 직후에 인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영원성을 우리 각자는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다. 물론 남들의 인지 과정에도 적용되는 절대적인 영원은 아니지만 개개인들만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상대적으로 우린 영원한 셈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짧디 짧은 영원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통기한처럼.
그 기한은 파인애플 스스로는 절대로 모르는 정해져 버린 시간이다. 그 시간이 있는지는 파인애플은 모른다.
파인애플은 그저 힘껏 최선을 다해서 파인애플일 뿐이다.
그 파인애플은 본인이 파인애플로서 사라진다는 것을 모른다. 파인애플로서 사라진다는 것은 파인애플에겐 죽음일 테니. 죽고 나면 그저 썩어버린 미생물 덩어리일 테니. 그때는 더 이상 파인애플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파인애플은 파인애플로서 사라진다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파인애플은 살아 있다. 이제는 썩어버린 ‘그것’이 있기에 (구) 파인애플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 달달함이.
그 시큼함이.
잃어버렸을 때 더욱 짙어진다. 그 존재감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유통기한이 있는 파인애플의 삶은 아름다워진다. 엄밀히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떠올리는 그 기억들 덕에 파인애플로서의 파인애플은 더욱 짙어지는 것이다.
썩어서 악취가 나는 미생물 덩어리의 단계가 없었다면 녀석의 존재감이 이리도 무거울 수 있었을까? 아니 오히려 더 잊히지 않았을까? 멀쩡한 통조림 속 파인애플에게 누가 관심이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상대적 영원의 끝은 존재한다. 그 은은한 차가움 덕에 우리는 더욱 존재될 수 있고, 짙어질 수 있다.
끝이 없었다면, 죽음이 없었다면 오히려 잊혔을지도 모를 그 존재감.
유한하기에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