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스스로를 온전히 마주하는 시간

파리 | 얼론

by Hyeora

파리 기차역을 나서는 순간, 마주한 풍경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도시의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 거칠고 낯선 분위기가 공기를 감쌌다. 역 앞에서 이상한 향을 풍기며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이들을 주시하는 날카로운 시선들. 본능적으로 가방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몽마르뜨 언덕으로 가는 길,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냄새가 감도는 거리를 지나쳤다. 거리의 흔한 냄새라 생각했지만, 함께한 일행은 익숙한 듯 말했다. 이건 단순한 거리의 냄새가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라고. 그들이 대마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파리의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는 단연 캬바레다. 크레이지호스 쇼나, 물랑루즈등이 있는데 그중 물랑루즈를 관람하기로 했다. 디너쇼가 포함된 옵션은 아주 비쌌기 때문에 우리는 샴페인 반병이 포함된 티켓을 예약했다. 물랑루즈는 한국정서에는 전혀 맞지 않는 형식의 공연이다. 여자들은 대부분 상체를 노출한채 캉캉댄스를 추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살짝 놀랐지만 이내 춤과 의상, 에너지가 주는 화려함과 낭만에 재미있게 관람하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파리에서의 4일 중 2일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완전한 '혼자'의 시간. 파리의 첫인상이 영향을 미쳤을까, 괜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숙소 근처만 어슬렁거리다 해가 지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왔다. 겁을 잔뜩 먹고 침대에 몸을 묻은 채 넷플릭스를 틀었다. 낯선 도시에 홀로 있다는 사실이 익숙해질 틈도 없이,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둬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묵고 있던 호스텔에서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방에 새로 들어온 독일 친구의 놀라운 친화력 덕분에 숙소 1층에서 열리는 작은 파티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국적의 또래들과 나누는 대화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유쾌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온 우리가 즐기는 노래와 드라마가 닮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평소 외국 영화와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기도 했고, 그 친구들도 한국 콘텐츠를 좋아해 겹치는 취향이 많았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서로의 여행지를 공유했고, 나는 낮에 혼자 들렀던 식당을 추천했다. 이란 친구는 루브르 근처의 아늑한 카페를 알려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다음 날 아침을 먹기로 했다. (루브르에는 10시에 입장할 계획이었지만, 전날 밤이 너무 즐거웠던 탓에 결국 11시에야 도착했다.)


오르세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와, 미술관 앞 다리에서 센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 신호등 앞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영어 할 줄 알아?”라는 질문에, 내가 ‘할 줄 안다’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I want to tell you that you are really beautiful.” 그 말과 함께, 그는 웃으며 지나갔다. 프랑스인들이 지나가다 이렇게 말을 건다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정말 신기했고, 그 사람의 미소와 함께 흘러간 한마디가,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곳이 정말 외국이고, 이곳의 공기와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어느새 여행의 또 다른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근처의 작은 빵집에서 갓 구운 바게트를 손에 들고, 에펠탑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었다. 에펠탑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에 앉아 바게트를 한입 베어 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갑자기 근처에서 비둘기들이 하나둘씩 내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비둘기 떼들이 모여드는 풍경은 이제 익숙한 일, 그래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무시한 채 공원에서의 고요한 휴식을 계속 즐기고 있던 찰나, 한 비둘기가 날아가며 내 바게트를 쪼아 땅에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날아갔다. 그 순간, 한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비둘기떼가 순식간에 내 바게트를 향해 몰려들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들만의 식사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혼자라고 해서 모든 순간이 고요하고 외로울 필요는 없다는 것을, 파리의 밤은 가르쳐 주었다. 여행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 속에서 진정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걸, 그 고요한 도시의 불빛 아래서 비로소 깨달았다.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은 예상치 못한 만남과 따뜻한 순간들로 채워졌고, 그 소소한 순간들이 쌓여가며 나는 조금씩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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