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 머물고 싶은 도시
아침에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우리는 영국의 애프터눈티를 즐기기로 했다. 찻집으로 향하는 길에 마법서적을 파는 책방을 보게 되었다. 재밌다고 생각하며 러블리*한 애프터눈티를 마시고 나와 템즈강으로 향하는 길에 마녀들과 그들의 마법서적을 파는 책방을 또 만나게 되었다. 괜한 무서움에(들어가게 되면 어쩐지 맑은 눈에 광기가 들어찬 점원이 맞이해 줄 것 같은) 두 가게 모두 지나쳤지만 나중에 런던에 오게 되면 재미로 한권쯤은 사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홍차 두개와 스콘 하나를 주문받으며 직원이 lovely라고 말했다. 확인했다, 좋아요, 알겠어요 등의 의미로 쓰이는 영국식 표현이지만, 영국에 와서 이 단어를 들어본 장소는 이곳뿐이다.)
템즈강을 따라 런던 타워, 타워브리지, 시청사, 테이트 모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밀레니엄 브릿지등의 야경을 구경했다. 강 위로 반짝이는 조명이 일렁였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만큼 도시의 밤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밀레니엄 브릿지를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지만, 퇴근길 인파가 다리를 가득 메웠다.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으나,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그들의 하루 끝을 함께 바라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퇴근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빠르게 길을 걷다가 야경에 멈춰서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사진을 찍고는 이내 다시 바쁜 도시의 흐름 속으로 사라졌다.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라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내부가 살짝 보였고, 전공 공부를 할 때 봤던 극장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묘한 설렘을 안겨주었다. 이곳에서는 겨울을 제외하고 셰익스피어 연극이 공연되는데, 다음번에는 따뜻한 계절에 다시 찾아 공연을 꼭 보리라 다짐했다.
강변을 따라 걷는 동안 바람이 매섭게 불었지만, 런던의 거리는 여전히 생동감이 넘쳤다. 놀랍게도 반바지와 나시를 입고 러닝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행과 ‘운동복을 챙겨올 걸...’ 하며 아쉬워했지만, 우리가 짠 일정 속에 운동을 넣기엔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여행에서는 한 박자 느긋한 일정을 가져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날,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는 걸 깨닫고, 오늘은 뮤지컬 <위키드>를 보러 갔다. <위키드>는 그동안 듣기만 했던 작품이었기에 기대감이 가득했는데, 이번에는 초록색과 핑크색 칵테일을 손에 들고 공연을 관람했다. 술을 마시며 공연을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지만, 물을 마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연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와 음악, 배우들의 연기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다채로웠다. 그곳에서의 공연은 관객들의 반응이 뜨겁고, 그 에너지가 객석과 무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나를 몰입하게 만들었다.
특히, 엘파바와 글린다의 갈등과 성장은 단순한 뮤지컬 속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과도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마법과 음악, 의상에 빠져들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메시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엘파바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글린다의 자아 찾기는 내 삶의 방향성을 되짚어보게 했다. 런던에서 본 위키드는 마법 같은 무대 디자인과 강렬한 메시지가 어우러져, 나는 그 순간 오즈의 세계에 살아 숨 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감정과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교감,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바로 나만의 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마법 같은 경험들이 내 일상에 스며들며,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런던 거리를 걸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여행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단 8시간 후면 파리행 기차에 오를 것이고, 그러면 이 거리의 분위기를 오랫동안 느낄 수 없겠지. 회색빛 도심 속에서도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했던 이곳, 카페 테라스에서 맥주와 홍차를 즐기던 사람들, 공원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던 노인의 모습까지...
나는 런던의 이 모든 감성과 분위기에 깊이 빠져버렸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파리로 갈 준비를 하곤 퉁퉁 부은 얼굴을 가라앉히지도 않은 채 숙소를 나와 역까지 걸어가는 도중, 우리는 여우를 마주쳤다. 여우가 돌아다니는 도시라니, 런던은 신기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