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1. 익숙함 속의 낯섦, 그 특별한 차이
우리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예약했다. 이미 영화로 여러 번 접했고, 한국 내한 공연도 본 터라 잠시 고민했지만, 전용극장만의 특별함을 기대하며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야말로 '오페라의 유령'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화려한 기둥과 천장을 감싸는 프로시니엄 아치, 시간이 멈춘 듯한 웅장한 분위기. 마치 어딘가에서 팬텀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이 펼쳐졌다. 귀족들이 오페라를 즐기던 시절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Her Majesty's Theatre는 '특별한 밤이 될 거야'라는 예감을 선사했다.
경매 장면과 함께 과거로 회귀하는 순간, 천장으로 솟구치는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입이 떡 벌어졌다. 단순한 무대 연출이 아니라, 극장 전체가 한 편의 예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특히 팬텀이 크리스틴을 지하실로 데려가는 보트 장면은 영화보다도 강렬했다. 무대 장치들이 부드럽게 솟아오르고 사라지며 몽환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전용극장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본 내한 공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입체적인 연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이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유럽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문화가 눈에 들어왔다. 공연을 관람하며 와인이나 위스키를 가볍게 즐기는 관객들. 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쩐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무대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문화. 그것이야말로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2. 영화 속 현실, 그리고 기묘한 융합
해리포터 스튜디오로 떠나기 전 소호 거리를 거닐기로 했다. 아직은 한산한 소호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걸을 때마다, 로제의 ‘A.P.T’가 귓가를 채웠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니 마치 이곳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거리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화려한 간판들이 늘어선 길을 걷다 보니, 서울의 명동과도 닮아 있었다. 그런데 문득, 기념품 가게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 ‘둥글게 둥글게’. 런던 한복판에서 한국의 동요가 울려 퍼지는 이 기묘한 순간은, ‘오징어 게임’이 만들어낸 문화적 파장을 실감하게 했다.
어릴 때부터 해리포터 시리즈를 사랑했던 나에게, 오늘은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었다. 영화 속 마법 세계가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고, 익숙한 소품들이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곳곳에 배치된 촬영 세트와 디테일한 소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느라 시간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터맥주를 한 모금 마셨을 땐 살짝 실망스러웠지만, 마지막 전시장에서 마주한 거대한 호그와트 모형 앞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에 압도당해, 그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하나둘 모은 도장들을 살펴보던 중, 정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보낸 이곳에서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살짝 아쉬웠지만, 이 벅찬 감정은 도장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을 것 같았다.
저녁은 조금 색다른 경험을 해보기로 했다. 특이하게도 중식도를 사용하는 스테이크 하우스를 찾았는데, 무거운 칼을 손에 쥐고 두툼한 스테이크를 자르는 느낌이 꽤 새로웠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주문과 계산이었다. 바쁜 매장 안에서 웨이터의 시선을 사로잡기란 쉽지 않았다. 최대한 또렷한 눈빛으로 웨이터를 향해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의 존재는 곧 잊혀지고 말았다. 한참 뒤에서야 우리를 발견한 웨이터는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작은 선물을 건넸다. 급한 일정이 없었기에 오히려 이 예상치 못한 기념품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계산을 마치면 중식도 모양의 토큰을 받게 되는데, 이를 매장 바로 앞 아이스크림 바에 가져가면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토큰을 각자 두 개씩 받았고, 하나는 기념품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바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손님이 토큰 두 개를 넣었는데, 바텐더는 그가 혼자 온 줄 알고 아이스크림을 하나만 내주었다. 손님은 망설이는 듯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토큰을 넣는 모습을 바텐더에게 확실히 보여주며 아이스크림을 요청했다.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여행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