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영원회귀:바이럴
저는 한국 힙합 고유의 문화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이 귀결은 제가 한국 힙합을 잘 안 듣게 되며, 반지성주의의 기초가 되는 장르라는 일반화된 대중의 결과로 나아가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의 긍정, 예로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은 오직 1등의 상금을 위해 주관적인 청취와 향략은 배제되며 절대적 심사와 대중 평가만이 있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할 자본의 구조와 동일한 논리를 취합니다. 노동을 상품화 하기는 이 방송을 통해 더욱 더 표면화 되는데, 래퍼들의 물상화와 이러한 체계주의적인 가치 제도는 힙합의 본질과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힙합이란 흑인의 문화로서 파생된 것으로 경찰 비판, 제도권을 비판하는 부조리의 대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시민적인 개인의 범주적 삶에 한정되는 비판이라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부조리를 많은 이들에게 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은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는 수단이었으면서 자본주의에서 출세를 위한 발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도권의 비판이 혐오로, 배제로 변질되어 갑니다. 그러한 힙합 문화의 단점들이 한국에서는 더욱더 심화되어 갑니다. 경찰을 싫어하고, 마약을 하고, 여자를 많이 사귀는 게 제도권의 저항, 담론의 배제인가요? 아닙니다. 담론 안으로 귀결됩니다. 신자유주의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면서 우울증이 기능합니다. 우울증의 발현. 불가능에서의 무기력함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가능한 것들이라는 전제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로 emo 랩 같은 경우는 퇴폐, 과다 약물, 비참한 자아 나르시시즘을 전면으로 부각해 음악성보다는 자아의 느낌과 투사만을 염두에 두는 상표성입니다. 래퍼들의 이러한 과도하게 내면화된 무력감의 장르인 Emo hip-hop은 사회의 폭로가 아니라 더려 은폐적인 사회 현상일 뿐입니다. 약물에 도취된 자신을 대상화해 랩으로 풀어쓰는 것을 그저 자신의 상품화로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되게, Danny brown이라는 래퍼의 정규 4집 Atrocity Exhibition는 이러한 약물중독의 위험을 역설적으로, 광기적으로 표현해 청취적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는 이 앨범에서 자신의 약물 중독과 반사회적이라 표상될 수 있는 정신들을 자기 풍자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유머스러움과 광기의 조화로 익스페리멘탈 힙합에서 새로운 선두 주자로서의 앨범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자기 파괴적 가사가 자신의 대상화로서의 자기의식적 나르시시즘이 아닌, 이 앨범에서는 자아를 설정되지 않는 외부의 영역을 광기로서 점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는 예술의 상품화를 사운드의 이질성과 가사의 파편적 요소들로 이러한 지점들에 대해 조소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플랫폼 서비스 시대에 음악은 상업 예술로 정의되기에 이릅니다. 아티스트들은 음악을 하기 이전에 생계를 유지할 의무가 주어진 자들이기도 합니다. 현재, 자주 볼 수 있는 현상 중에 하나인 바이럴도 이와 유사하게 흘러갑니다. 국내외 아티스트들은 모두 자신을 홍보하여 알리기 위해 숏폼과 같은 콘텐츠를 적극 활용합니다. 이것은 나쁘다기보다는 매체 구조상의 변화와 함께 그들의 전략이 바뀐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일수록 아티스들의 상품화가 본격적으로 더더욱 쉽게 확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감에 따라, 예술을 위한 노고보다는 한 번의 기회를 노리며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생산해나는 것입니다. 같은 비트, 같은 믹싱, 비슷한 장르들의 혼성이 유행이라는 명칭으로 대부분의 래퍼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앨범이라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자신의 외적 이미지의 고양을 위한 상품을 생산해 내는 느낌입니다. 바이럴로 한번 높게 올라간 곡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곡은 원본도 모른 채 숏폼이라는 항해에 뛰어들어 같은 구간의 반복만을 되풀이하는 영원회귀가 될 것입니다. 바이럴 된 곡은 그 곡을 생산한 아티스트들을 뛰어넘어 그에게서 종속되지 않는 외려 그를 종속시키는, 소외화를 만들어냅니다. 바이럴 시대에서 예술을 위한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예로, 켄드릭 라마의 TPAB는 처절할 정도로 부조리와 그의 신앙심을 보여주며 제즈와 힙합을 합친 대작입니다. TPAB의 마지막 트랙인 Mortal man은 자신의 우상이었던 2 pac을 마지막 대화로써 연출하며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담습 한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칸예 웨스트(2000년대의 자아성찰적 시기와 2010년대의 프로그레시브 한 사운드의 구축을 야기한 시기 둘 다)도 예술 산업의 가능성을 연 인물입니다. 서양만이 아닌 Nujabes 등 다양합니다.
힙합의 가능성은 가사에서도, 사운드에서도 올 수 있지만 한국은 이것을 둘 다 결허하는 지점이 많습니다. 가사는 안 좋지만 생산기계적인 프로듀싱과 비트들은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보다는 그저 이미지의 총체로서의 힙합에 대한 관념의 몰두처럼 보입니다. 한국의 힙합이 그저 대중문화 산업이 되어가는 것에는 안타까움 뿐입니다. 삶을 위한 예술, 혹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돈을 위한 산업의 포섭된 자들만 팽배해져 간다면 세대 간의 예술적 존경과 그에 대한 우상의 극복이라는 서사 자체도 부재할뿐더러, 하나의 문화로서 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