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의문

정치적 제도로 소비된 게임이라는 매체

by ㅅㅇㅎ

게임이 폭력성을 높이는가?

먼저, 이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던데, 나는 관점을 한 쪽으로만 볼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양가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두 측면의 관점 모두 이해는 간다. 하지만 폭력성의 발현이라고 보는 쪽이 조금 더 전제된 인식에서 둘러싸인 느낌이다. 어떤 뉴스에서 아이가 학교에서 폭력을 가행했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뉴스나 매체들은 아이가 게임을 많이 한 전적이 있다면(fps이면 더욱더) 폭력의 인과적 원인을 게임에 전적으로 치중시킬 것일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런 것일까? 보수적인 시대정신이라도 반영한 것일까? 아니면 부모의 바람을 표면화시킨 것일까? 사회적으로 '게임 중독자'나 '히키코모리'라는 용어는 인터넷에서나 리얼리티에서나 조소나 비방 혹은 자해적 자아 상정으로도 많이 쓰인다. 폭력성의 발현, 게임 중독이 정말 개인의 고립된 자아만을 상정하고 인과적 원인의 책임은 모두 그 개인 만인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뉴스나 기사들에서의 분석이나 정신상담은 사회 구조를 못 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매체들이 사회의 부조리를 은폐시키는 것을 넘어서 개인만의 문제로 상정해 사회를 의식적이지 않게 정당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몇몇 게임이 폭력적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에서의 폭력성이 타인에게 가해질 것이라는 추론에는 근거가 부실하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사회적 문제로 돌아와 게임 중독자들이라고 언명되는 자들이 다 사회의 담론에 의해 배제된 자로 표면화된다.(사실 담론은 이것을 포섭한다. 인터넷 갤러리에서는 이러한 것을 통하여 정체성과 소속감을 달성시켜 사회에서 배제되는 고통과 문제들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제도로 표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의 문제는 개인의 선천적 정신 문제이기보다는 학습 제도나 교육 제도, 환경의 문제가 더 크다고 느낀다. 교육 제도는 경쟁적 위치를 개별자들에게 부여시켜 교육에서의 평등의 중요성이라는 인문학적 가치들을 전파해도 현실과는 다른 괴리감으로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차별이라는 개념이 사회 전반에 들어서게 된다. 학생들은 타자와의 차별을 통해 집단을 구성해야 했다. 여기서 배제된 자들은 누구인가. 희생양, 르네 지라르의 이론에서 보이는 희생양은 박해됨으로써, 공식적으로 금기시된 언명들을 들어도 되는 제한적 합법의 존재자로서 상정되며 박해될수록 집단의 조직력과 소속감은 높아진다. 너무 사회학적이거나 인문학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전파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러한 형태의 집단성의 추구는 어디서든 나타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학교라는 교육 제도에서 개개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는 경험이 결여하고 이미지가 매게 되어 있다. 소통에는 어떤 환상을 부여해야 하는 이미지가 있어야 하는 사회가 현재 진행형으로 촉구되고 있다. 경쟁 사회와 스펙터클의 사회, 이러한 일상적으로 스며든 관념을 변화시킬 매체로서 게임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학교라는 사회의 공적인 공간을 사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학교도 순결한 공간이기보다는 정치적 공간이다. 교육에는 어떠한 배움을 위한 배움 보다는 어떠한 집단정신의 동일성, 동일한 목표의 경쟁 추구를 통하여 제한된 인원의 과다로 학생들의 경쟁은 치열하게 불타오른다. 여기서 재능적으로나 노력적으로나 어떠한 열등감과 패배주의적 인식으로 목적의 상실을 겪는 자들이 산출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동일한 목표의 추구는 학교라는 교육 제도가 부추기는 것이기에 파시즘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선생들이나 공적 교육에서 그냥 빈말로 주체적인 삶, 개인의 자율성과 꿈의 실현을 위한 촉구등이 전부 제도와의 괴리감으로 들어봤자 쓸데없는 잡설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경쟁은 소외자들을 생산하며 낙후되거나 소외된 자들의 갈 곳은 경쟁의 사회=현실과 대립되는 사적 공간=집=인터넷=가상현실 등의 공식이 성립된다. 이러한 일반화는 피하고 싶지만 미안하다. 전개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정도 필요한 법이니. 개인의 내면화된 억압들은 무의식으로 점진적으로 옮겨가며 그들의 해소는 의식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학교에서 스며드는 방식은 환멸적이라고 느껴지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지각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개념화된 성숙의 원형은 자본주의로 편입되는 과정을 긍정하라는 것이 아닌가? 학교에서의 학생들의 소외,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 잉여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등 이 모두 자본주의에 밑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소외된 자들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노력하면 된다는 환상을 심어주며 착취를 은페한다. 사실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착취를 당하는 것은 학생이다. 파이어스톤의 교육제도 폐지 입장을 읽었을 때는 멋모를 쾌감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학생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며 그들에게 대안의 결여 때문이다. 학생들, 그 후 성인이 된 자들 모두 사회와의 공동체 속에서 생활양식의 약간의 변동을 주거나 그에 맞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이 패배자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가 자본주의의 동력에 의해 피를 다 빨린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다. 나는 정신분석학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로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삶에만 반영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이론처럼 필연의 인식이 곧 자유라는 말처럼 사회 구조의 인식을 통해 자유를 얻어야 한다. 사실 인식 자체가 자유다. 사회를 다원적으로 파헤칠 줄 아는 관점의 증대가 니체가 말한 힘의 증대의 느낌이 아닐까?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의 가치를 사회의 목적과 결부되지 않아 있다고 의식적이 기지 않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자신이 상정한 자아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

게임은 사회에서 도피처처럼 인식되는데 도피처가 아니라 실재만큼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 형식이지 않을까 싶다. 방구석에서 영화를 많이 보면 시네필이고 방구석에서 게임을 많이 하면 중독자인 것인가? 게임 중독은 사회의 피해의 징후가 아니라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외자들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라도 벗어내기 위한 서술들이 성공했기를 바라며 정열에 가득 찬 복잡한 문체를 너그럽게 이해주기를 바란다.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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