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신화 사이
많이 낡긴 했지만 꽤 튼튼하게 만든 구두다. 베를린 시립 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소중히 모셔둔 낡은 한 켤레 - 갈색 쎄무 여성화인데 한 짝은 옆으로 뉘어 놓았다. 나무 재질의 밑창과 거기 박힌 못을 좀 자세히 보라는 것 같다. 분명 사연 있는 구두일 것이다. 닳아버린 굽과 갈라진 가죽, 그 사이에 잿빛 먼지도 남아 있다. 이 구두 한 켤레는 2차 대전 직후 잿더미 속에서 도시의 잔해를 치우던 여성들의 작업화였다.
이 투박한 작업화의 주인공은 노라 폰 차바츠키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베를린에 살았다. 함께 전시된 작업증명서로 미루어 보아 1945년에서 1948년까지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2차 대전 직후 독일은 산더미처럼 쌓인 전쟁의 잔해를 치우는 일이 시급했다. 이 작업화의 주인공 노라와 함께 수많은 여인들이 잿더미를 오르내리며 벽돌을 골라내고, 벽돌에 달라붙은 시멘트를 깨고, 고철을 골라 분류하고 리어카를 끌었다. 베를린에서만 15세에서 50세 사이의 여인들 약 50만 명이 이 일에 동원되었다. 전 여성의 약 5%에 달하는 숫자였다.
1950년 중반, 여러 도시에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나 동상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경제부흥의 행복감 속에서 이들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잊었다.
오래 잊혔던 것들이 다시 깨어 일어날 때, 종종 신화로 부풀려진다. 돌 깨는 여인들이 신화로 부활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당시 여성사 연구가 활기를 띠며 „잊힌 여성 영웅“이라는 큰 제목으로 과학,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각 방면에서 비록 그 업적이 뛰어났으나 남성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도태되었던 여성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노년기에 접어들었던 "돌 깨는 여인"들의 자의식도 깨어났다. 연금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 속에서, 그들의 과거 노동이 사회적 공로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연금에 가산되는 성공적 결과를 얻었다. 이는 동시에 전후 독일 여성의 주체적 행위, 자기 확신, 그리고 국가 재건에의 기여에 대한 자부심의 성장 등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이 되었다. 이 해에 독일연방공화국은 수립 60주년을 맞았다. 이때 돌 깨는 여성들이 다시 집중조명을 받았다. 이들은 이제 화폐 개혁, 폭스바겐 비틀, 월드컵 우승과 함께 독일을 만든 ‘건국 신화’의 주역이 되었다.
매스컴에서 이렇듯 신화 수준으로 부풀리자 이제 다시 그 거품이 빠질 차례였다. 진실을 파헤치기 좋아하는 역사학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건국 신화‘내지는 폐허의 낭만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고 조목조목 따졌다. 당시 여성들이 폐허 정리와 돌 깨기 작업에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예외적 현상에 불과했고 특히 베를린 만의 현상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군과 프랑스군 점령지에서는 여성의 돌 깨기 작업을 허락하지 않았고 영국군 점령지에서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여성들이 대규모로 동원된 곳은 오직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했던 베를린과 구동독 지역(소련 점령지) 뿐이었다. 게다가 4억 입방미터에 달했던 거대한 잔해를 실제로 치운 것은 여성들의 ‘양동이 릴레이’가 아니라, 전문 기업들의 중장비와 기술자들이었다. 양동이로만 치웠다면 잔해는 아직도 도시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잔해 제거 작업은 이미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아직 나치가 집권하고 있었고 그들은 강제수용소 수감자나 전쟁포로들을 동원했었다. 강제노동이었다. 종전 직후에는 나치 부역자들에게 형벌로 그 일을 시켰다. 말하자면 여성 작업자들도 나치부역자였을 확률이 컸다. 그러므로 일반 시민들에게 ‘돌을 치우는 일’은 수치스러운 처벌이었다. 서독에서는 여성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1950년대 보수적 성 역할 규범이 지배적이었으므로 대중 담론 속에서 ‘폐허의 여인’이라는 집단은 부재했다.
그러나 서베를린은 상황이 달랐다. 일손이 절실했다. 여성들을 이 힘든 현장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이 작업에 덧씌워진 ‘처벌’의 이미지를 벗겨내야 했다. 1946년, 베를린의 언론들은 대대적인 캠페인이 시작했다. „나치 부역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선 영웅들"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건설 보조 여성 노동자’라는 딱딱한 공식 명칭 대신 ‘트뤼머프라오(폐허의 여인)’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여주었다. 베를린의 ‚건국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 험한 여성 노동에 대한 기억이 동독에서는 전혀 다르게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동독에서 „폐허의 여인“은 사회주의 국가의 근간, 노동력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재건의 조력자라는 이름으로 기념되었고 교과서에도 자리 잡았다. 사회주의 체제가 강조한 ‘여성의 평등한 노동 참여’라는 이념과 맞닿아 있었다. „가정으로 돌아가라 “는 서독의 이념과는 달리 동독 여성은 국가 건설에도 동등하게 기여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동서 베를린에 각각 세워진 폐허의 여인상에 각각의 이념이 투영되어 있다. 서베를린의 하젠하이데 공원에 있는 폐허의 여인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지친 듯 앉아 있다. 반면 동베를린의 여성은 어깨에 삽을 걸친 채 행진하는 중인 듯하다. 그 기상이 씩씩하다.
물론, 물자가 부족해서 나무로 밑창을 달고 돌더미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못을 잔뜩 박은 한 켤레의 작업화는 전쟁 직후의 피폐하고 고단한 삶을 증언한다. 동시에 기억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동독에서는 노동 경험이 사회주의 국가의 영웅 서사로 편입되었고, 서독에서는 오랫동안 가려졌다가 뒤늦게 ‘신화’로 되살아났다. 구두 밑창이 묻는다. 우리는 그 여성들을 누구로 기억할 것인가?
신화를 깨는 일은 민감하다. 그러므로 사학자들은 엄청난 사료를 분석하고 역사의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조명한 뒤, 정연한 과학적 논리에 따라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 사실성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사회의 반응이 흥미롭다. 모두 환영하는 눈치이고, 철저하게 검증된 "사실"에 거의 종교적 믿음을 보인다.
사라진 신화를 아쉬워하는 기색은 없다.
이렇듯 세상에 오직 ‚사실‘만이 존재해야 한다면 신화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이야기를 쓰다가 문득 독일에 동화는 많지만 신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신화를 잃는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