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속에 지상보다 더 큰 사랑이

베를린 천문대에서 나눈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 대하여

by 고정희

„우주 속에 지상보다 더 큰 사랑이 존재해 “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 가게 되면 길 건너 맞은편으로도 시선을 돌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거기엔 바닥에 촘촘히 모자이크 포장석을 박은 마름모꼴의 광장이 있다. 삼면에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중 마주 보이는 곳에 특이한 건물이 보일 것이다. 이 건물 역시 유대인 박물관을 디자인한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작품으로 유대인 박물관 부속 건물이다. 공식 명칭은 W. 미하엘(마이클) 블루멘탈 아카데미. 도서관과 여러 행사장이 들어 있다.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 이곳엔 대형 꽃시장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베를린 왕립 천문대가 있었다. 주변의 불빛이 너무 밝아지면서 천문 관찰이 어려워지자 1913년 포츠담으로 이전했다. 당시 베를린은 급격히 팽창하는 대도시였다. 천문대가 있던 린덴 거리 부지는 도심의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바벨스베르크로 짐을 옮기자마자 베를린 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1913년 8월에 건물을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프리드리히 신켈이 1835년에 설계한 아름다운 고전주의 건축물이 자취를 감췄다. 1846년 해왕성을 발견한 바로 그 역사적 장소가 도매 시장 등 새로운 자본 시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때 베를린은 그랬었다. 문화유산으로 지켜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아직 분간하지 못했다.


은하수의 별들은 왜 서로 부딪치지 않을까


1865년에서 1903년까지 천문대 대장을 지낸 빌헬름 푀르스터 (Wilhelm Foerster, 1832–1921) 교수는 어느 날 밤, 맏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천체망원경으로 은하수를 보여주었다. 아들은 그때 16세 고등학생이었다. 나이에 맞게 종교적 의문을 가슴에 터질 듯 품고 있었다. 그날따라 별빛이 유난히 밝았다. 마치 하늘 문이 열리고 그 문을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금빛 별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들은 문득 궁금해져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렇게 별들이 많은데 어떻게 서로 부딪치지 않아요? “. 그러자 아버지는 기특하다는 눈으로 아들을 보며 우주의 하모니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우주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전자기장이 있어 모든 별과 행성들이 자기의 괘도를 유지하고 회전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힘은 자기 괘도를 지키게 할 뿐만 아니라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유지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단다. 별들이 서로의 존재를 지켜주는 거지. 어쩌면 그것이 단테가 얘기한 '우주적 사랑'인지도 모르겠구나. 암튼 저 우주 속에 지상보다 더 큰 사랑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란다.”


꽃이 만발한 베를린 왕립천문대 입구. 화가였던 빌헬름 푀르스터의 아내가 그린 그림. © Marianne-Foerster-Stiftung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때는 1884년이었다. 그때 독일은 황제국이 된 지 십여 년이 지났고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의 손아귀에서 국수주의, 군국주의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 빌헬름은 저명한 천문학자일 뿐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국수주의, 군국주의를 누구보다 혐오했던 평화주의자였다.

얼마 후 그는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독일 평화협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다시 사회에 번지고 있는 반유대감정을 크게 걱정하여 "반유대주의 방어 협회" 설립에 적극 가담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믿었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그 광기를 막기 위해 그사이 장성한 아들과 함께 "유럽인에게 고함"이라는 반전 선언문에 서명했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그의 저서 "전쟁 일기"에서 빌헬름 푀르스터를 옛 독일의 정의로운 사고와 인도주의적인 정신을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푀르스터는 프랑스 입국이 허용된 유일한 독일인으로서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위해 헌신했다.



'끊임없이 경고하는 자'가 된 아들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날의 대화를 평생 잊지 않았다. 취리히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베를린을 떠날 때까지 그는 천문대에서 태어나 자란 은하수의 아이였다. 그에 얽힌 일화가 제법 많다. 아버지와 우주의 조화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 무렵 그는 학교에선 애국가 제창을 거부하여 물의를 빚었다. 가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애국가라기보다는 황제 찬양가라 하는 게 옳겠다. 가사를 보면 온통 전쟁과 승리의 찬양으로 일관하여 평화주의 은하수의 아이가 입에 담을 것이 못되었다.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 경제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두루 공부하고 윤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사회심리학으로 교수자격논문을 제출했다.

그리고 잠시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중 황제의 호전적인 연설을 혹독하게 비판해 황제 모독죄로 투옥되었다. 국가보다 정의가 먼저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으므로 황제의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개인의 양심과 기독교적 윤리를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부임했다. 거기서 교육학과 철학을 가르쳤는데 수업 시간에 독일의 군국주의와 비스마르크를 비판하여 소동이 일어났다. 당시 독일 대학가는 민족주의 열풍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1916년 그의 강의는 분노한 학생들의 폭동과 린치 위협으로 중단되었고 그는 두 학기 정직 처분을 받았다. 마침 시간이 생기자 그는 1차 대전 발발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그는 독일이 1906년과 1907년의 헤이그 평화회의를 방해함으로써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고, 결과적으로 전쟁 전 독일을 둘러싼 포위망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국제 사회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추진했던 군비 축소와 국제 재판 제도 도입을 독일이 앞장서서 거부하거나 무산시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푀르스터는 독일이 헤이그 회의를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막거나 최소한 독일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결국 독일 지도부의 군사적 자부심과 경직된 외교가 스스로 파멸로 이끌었다는 비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조국의 배신자'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누구보다 독일을 사랑했기에 독일이 도덕적 파멸로 가는 길을 막으려 했던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 외에도 러시아 혁명 전에는 레닌의 차가운 눈을 경고했고, 히틀러의 광기를 목청껏 외쳐 경고했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불태워졌고 그의 이름은 나차의 살생부에 올랐다. 결국 조국을 떠나야 했다.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거기서도 좀처럼 잠잠해질 줄 몰랐다.


지상에 존재하는 개체들 중엔 맹목적인 자기애에 따라 혼자 날뛰며 다른 개체의 궤도를 파괴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 미쳐 날뛰는 개체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그의 평생의 화두였다.


akademie-mit-baeumen-neu_galleryimage.jpg.jpg 유대인 박물관 부속 건물. 110여 년 전, 천문대가 서 있던 자리. Jüdisches Museum Berlin, Foto: Yves Sucksdor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