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이 로마라는데?

베를린의 지하철과 별명에 관하여

by 고정희

어제저녁, 나는 하마터면 영화 „Hamnet “앞부분을 통째로 날릴 뻔했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가던 길이었다. 범인은 베를린 지하철 7호선. 플랫폼이 인파로 가득한 것부터 수상쩍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광판에는 '불규칙 운행'이라는, 베를리너라면 누구나 혈압이 오를 만한 문구가 떠다니고 있었다. 한참 만에 나타난 열차는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다. 술냄새 땀 냄새에 마늘향까지 섞인 한숨 가득한 그 좁은 칸에 몸을 구겨 넣으며 도서관을 다녀오는 길이라 가방에 들어 있는 두꺼운 책 제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를린. 현대사의 로마“. 아, 영광스러운 나의 베를린.


가방에 든 책은 꽤 유명한 역사학자 한노 호흐무트라는 자가 쓴 20세기 베를린 역사서다. 300 페이지가 넘는 데다가 하드커버라서 옆사람을 쿡쿡 찌르는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사실은 책 제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빌린 책이다. 책 제목을 이해 못 한 건 평생 처음이다. 도서관에서 그 책을 보았을 때 제목을 두어 번 다시 읽었다. 베를린이 현대사의 로마라고? 뭔 소리야? 무슨 뜻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살펴보니 저자는 친절하게 서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베를린을 로마와 비교한 첫 번째 인물은 다름 아닌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2차 대전의 불구덩이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난 베를린을 방문했다. 아니 동서로 갈라져 장벽이 세워진 서베를린을 찾았다. 그리고 임시 시청사 앞 광장에 구름같이 모인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천 년 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입니다.


케네디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라는 말을, 그것도 독일어로 했다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앞뒤 맥락 없이 인용되는 문장이어서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싶기는 했지만 굳이 캐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로마 시민에 빗대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아마 민망해서 아무도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케네디가 베를린을 로마에 빗대었다고 해서 그걸 자랑스럽게 여길 사람들이 아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베를린은 현대사의 로마라고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자유 세계를 지켜내는 서베를린 시민들을 추켜주기 위해 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후 반세기가 지난 2010년, 베를린 문화국 차관 안드레 슈미츠가 뜬금없이 다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수도 베를린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를 도시 마케팅 팀에서 넘겨받아 „ 베를린은 이제 티베르 강변의 '영원한 도시(로마)'보다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로 의미가 전이되었다.

같은 문구를 옮기는 동안 의미가 자꾸 변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것으로도 왜 책의 제목이 „베를린. 현대사의 로마“여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좀 더 읽어보니 그는 베를린이 20세기의 비극과 영광이 층층이 쌓인 현대사의 지형이라고 표현했다. 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가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에 그 흔적을 남겼듯 베를린은 현대사의 다양한 시대들이 남긴 흔적의 지형이라는 것이다. 그건 그럴듯했다.


베를린은 프로이센 군주제의 수도였고, 민주주의의 수도였으며, 파시즘의 수도이자 사회주의의 수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두 번의 세계 대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그 결과는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다시 이 도시로 되돌아왔다. 베를린에서 냉전은 그 절정에 달했고, 또한 베를린에서 냉전이 상징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는 베를린의 20세기 역사는 다른 도시가 따라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로마에 비유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베를린 시민들은 이 용어를 거의 아무도 모르고 있다. 만약에 친구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알고들 있었니? 베를린이 현대사의 로마라는데? “그런다면 마시던 와인을 뿜으며 웃음을 터뜨릴 것이 뻔하다.


베를린은 베를린일 뿐이다.


지하철은 제 때 오지 않고, 거리 휴지통엔 쓰레기가 역사처럼 켜켜이 쌓이고, 도시 전체가 영원한 공사장이어도 스스로 충분한 도시다. 다른 도시와 비교할 이유가 없다. 굳이 비교한다면 바빌론 정도?

아베 Ave, 바빌론 베를린!


w2480_h2486_x1240_y1243_DPA_bfunk_dpa_5FADA8002791A500-704890d9b0bd8763.jpg 케네디 보러 몰려든 인파. 1963년 6월. ©Landesarchiv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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