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없는 도시 베를린
할머니 동상에 빙의한 케테 콜비츠의 표정이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옆에선 아이들이 뛰놀고 있지만 케테의 시선은 아이들을 비켜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다. 자리가 편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라고 나름 짐작해 버린다. 그녀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는 그 자리가 의사 남편 칼이 살아생전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촌이었다. 콜비츠 부부도 물론 그곳에서 살았다. 그런데 남편의 병원과 부부가 살던 아파트, 케테의 아틀리에가 있던 건물은 2차 대전 때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
전후 이 구역이 동베를린에 속하게 되면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녹지를 “콜비츠 플라츠”라고 바꿔 불렀다. 전쟁 중에 사망한 칼 콜비츠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1961년에는 케테의 할머니 동상을 만들어 그 입구에 앉혔다. 그렇게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두 사람 다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사실 그들의 영혼은 여기 베를린이 아닌 벨기에 블라슬로의 독일군 묘지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18세로 사망한 둘째 아들이 거기 묻혀 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 구역을 “콜비츠 키츠Kollwitz Kiez”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베를린 시 정부에서는 케테 할머니를 그곳에 앉혀 놓은 뒤로 그 동네를 통 돌보지 않았다.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거의 모두 외곽에 들어섰고 콜비츠 키츠의 건축들은 낡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새로 짓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나갔다. 빈집이 많이 생겼다. 몇몇 예술가들만 남았다. 그러다 통일이 되었다. 더 많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예술가들은 왜 늘 가난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화장실도 없는 빈 집에 그냥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와 함께 통일 직후에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떠 오른다. 건물들이 거의 다 쓰러질 듯 낡았지만 거리엔 보헤미아의 낭만이 가득했다. 그때 왜 이리로 이사하지 않았는지 이따금 후회한다. 당시엔 욕실도 제대로 없는 그 낡은 건물에 들어 가 살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곳이 불과 몇 년 만에 베를린에서 가장 핫한 거리가 될 것을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거리가 돈이 되겠다고 예리하게 판단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개발업자들이다. 그땐 건물값이 껌값이었다. 사서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선견지명이 있기에 돈을 잘 버는 모양이다. 많은 비용을 투자하여 고급 아파트로 변신시켰다. 신데렐라가 먼지를 털고 공주가 되는 순간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그 고급 주택값을 감당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결국은 밀려나서 조금 외진 곳으로 갔다. 남으로는 노이쾰른, 동으로는 프리드리히스하인 그리고 북으로는 베딩으로 갔다. 서쪽으로는 가지 못했다. 서쪽은 집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서베를린 토착민들이 버티고 있기에 비집고 들어 갈 곳이 없었다. 장벽은 무너졌지만 그대로 서 있었다.
콜비츠 키츠에는 이제 고상한 명품으로 치장한 유피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고급 헤어 살롱도 문을 열었다. 인근에는 고급 갤러리 거리도 형성되었다. 이 거리는 곧 소위 말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가 되어 해외로까지 소문이 퍼졌다. 베를린을 좋아한다는 케이트 블란쳇이 한때 여기에 집을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그냥 소문이었던 것 같다. 케이트 블란쳇은 여기 살아도 좋다고 내 멋대로 허락한다.
케테 할머니 동상 주변으로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가 반려견을 끌고 어슬렁 거린다. 나는 동상 뒤편의 돌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척하며 혹시 동상에 실례하는 건 아닌지 노려본다. 문득 왜 아직도 여기 계신지 물어볼까 말까 망설인다. 그냥 훨훨 털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면 어떠실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는 것 같다. “어디로?”. 그래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