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작별

케테 콜비츠가 배웅한 막스 리버만의 마지막 길

by 고정희


“막스 리버만이 죽었다. 그를 위해 죽음을 원했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니 커다란 충격이 왔다.”

1935년 2월,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일기에 짧지만 무거운 문장을 남겼다. 나치의 압박 속에서 고립된 채 87세로 생을 마감한 ‘독일 인상주의의 거장’ 막스 리버만 Max Liebermann(1847~1935). 나치는 그의 죽음을 철저히 외면했고, 예술가들에게 그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했다. 하지만 케테 콜비츠는 빈소를 찾아 뼈만 남아 앙상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고 장례식 때 다시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체포의 위험도, 예술가로서의 생명이 끊길 위협도 그녀의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에 대한 예우였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빛의 거장, 어둠의 화가를 알아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테 콜비츠는 21세의 신예였고 20세 연상의 막스 리버만은 베를린 예술계의 거장이었다. 케테 콜비츠가 베를린 미술 대전에 '직조공의 봉기 연작'을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이었던 막스 리버만은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빛의 유희’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어둠의 진실을 보았고 감격했다. 리버만은 상류층 유대인으로서 교양과 여유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지만, 콜비츠의 거칠고 투박한 선 안에 담긴 민중의 비통함이 곧 예술적 숭고함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무엇보다 케테 콜비츠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에 흥분했다.


그는 곧 황제 빌헬름 2세에게 가장 뛰어난 작품을 제출한 케테 콜비츠에게 훈장 수여를 제안했지만 황제는 콜비츠의 작품을 ‘시궁창 예술’이라 비하하며 거부했다. 리버만은 황제와 기존 화단의 권위에 맞서며 케테 콜비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케테 콜비츠를 분리파로 끌어들이고 베를린 예술원 회원이자 미술대학 교수의 길을 열어 주었다. 리버만에게 예술적 자유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세계의 진실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전이: 부르주아적 관조에서 실존적 연대로


케테 콜비츠가 뮌헨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시절 리버만의 화풍에 반하여 자주 따라 그렸다. 그러나 케테는 곧 자신 만의 예술 세계를 발견한다. 빈민촌 환자를 돌보는 사회주의 성향의 남편과 오빠의 영향도 컸다. 그리고 그 무렵 읽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소설 “직조공의 봉기”가 결정적이었다.

콜비츠 자신은 비록 가난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공감 능력으로 굶주린 아이들과 전쟁의 폐허를 판화에 새겼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를 통해 삶의 무게를 견뎠다.


리버만은 자유주의적 관조자처럼 보였으나 케테 콜비츠의 일기 속에서 리버만은 “고결한 노신사”이자 “예술적 기준점”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평행선 같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예술적 정직함이었다. 리버만은 예술이 권력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혐오했고, 콜비츠는 예술이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주는 역동성과 그 이면의 고독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척박한 프로이센의 예술 토양 위에서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암흑기 속에 핀 고결한 우정


나치가 권력을 잡은 1933년 이후, 두 사람의 삶은 급격히 침몰했다. 리버만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콜비츠는 반나치 성향의 사회주의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명예를 박탈당했다. 리버만은 죽기 직전 "나는 더 이상 내 고향 베를린을 알아보지 못하겠다"며 한탄했다.


콜비츠는 그가 겪는 수모를 자신의 고통처럼 느꼈다. 리버만의 몰락이 곧 독일 지성의 몰락임을 통찰했다. “그를 위해 죽음을 원했다”는 그녀의 일기 구절은 냉혹한 문장이 아니라, 나치의 야만적 세상에서 리버만이 겪어야 했던 인간적 모멸감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깊은 연민이었다. 고결한 노화가에 걸맞은 고결한 안식을 기도했다.


리버만의 장례식 날, 나치의 눈을 피해 백명의 조문객이 모였다.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나치가 정의한 '순독일인'은 콜비츠와 동료 부부 단 세명이었다. 리버만을 배웅하는 것은 그녀에게 절대 피해서는 안 되는 인간 된 도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왔던 자유로운 예술의 시대를 배웅하는 것임도 직관했다.


오늘 베를린에서


리버만을 떠나보낸 후 케테 콜비츠는 10년을 더 버티며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하다 종전 직전 세상을 떠났다. 현재 베를린 파리 광장 Pariser Platz에 복원된 리버만의 집과, 노이에 바헤(Neue Wache)를 지키고 있는 콜비츠의 조각 “피에타”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체포를 각오하고 장례식 행렬에 가담했던 콜비츠의 용기는, 예술이 정치보다 강하고 우정이 공포보다 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빛을 그리던 노화가와 어둠을 새기던 여류 화가. 두 사람이 나눈 묵직한 연대가 오늘 2026년 1월의 차가운 베를린 공기 속에 온기로 남아 있을까?


Kollwitz_Pieta_JHG_20060526.jpg 베를린 노이에 바헤 건물을 지키는 콜비츠의 피에타. ©고정희


10-Kaethe-Kollwitz-Freunde.jpg 작품을 심사하고 있는 콜비츠와 리버만. 콜비츠 옆, 프로필을 보이는 노신사가 리버만이다. 각각 60세, 80세. 출처: Käthe Kollwitz Musem Ber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