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비츠의 자화상 - 자신과 나누는 시각적 대화

백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긴 케테 콜비츠 - 무엇 때문이었을까?

by 고정희

Köln

Köln

Käthe Kollwitz Museum Köln

케테 콜비츠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다. 이례적이다. 오로지 램브란트 만이 비슷한 숫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자화상은 그저 얼굴의 기록이 아닐 것이다. 케테 콜비츠가 자주 자화상을 그린 데에는 대개 네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콜비츠는 자신의 자화상을 “자신과 나누는 시각적 대화”라고 불렀다. 끊임없이 내면을 짚어 보는 수단이었다. 1917년 50세의 콜비츠는 "자신을 부정하지 말 것. 이미 형성된 자신의 인격을 지키되, 그 본질을 구현해 낼 것"이라고 일기에 썼다.


실용적 이유도 무시 못한다. 모델이 궁하면 자신을 모델로 삼는 수밖에 없다. 특히 얼굴과 손 - 콜비츠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 도구 -을 이용해 어려운 구도나 조명을 연구하고 애칭, 석판화 기법을 연마했다.


여성 예술가로서의 자의식도 한 역할했을 것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콜비츠는 베를린 예술원의 높은 문턱을 넘은 최초의 여자였다. 차별이 몹시 심했던 시대였고 남자들이 겁 없이 “여자들은 예술가 자질이 없다”라고 떠들 수 있는 시대였다. 이 시대에 그린 케테의 자화상은 매우 강렬하다. 옷깃에 손을 넣고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 등, 당시 남성 예술가들의 전형이었던 결연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전문가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다는 설도 있다.


후기 자화상은 고통과 노화의 기록이다.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던 케테가 시대의 폭력 앞에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그 고통을 '예술'이라는 언어로 번역해 냈는지 보여주는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다. 얼굴은 깊은 음영과 본질적인 선만 남은 ‘영혼의 풍경’으로 변모한다.

콜비츠의 자화상은 평생의 그림일기였다.


"더 이상 아름답게 그릴 필요가 없다. 오직 진실만을 남겨야 한다."


도전적인 초기 자화상도 인상적이지만 구부러지고 주름진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한 마지막 자화상들이 절정이 아닌가 싶다. 그 자화상에서 우리는 장식된 예술이 아닌, 가공되지 않은 삶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요즘 한국은 K-뷰티 운운하면서 늙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 르네 진테니스 이야기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늙고 주름진 얼굴과 흰머리의 아름다움은 내면의 진정성의 표현이며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이다.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케테 콜비츠의 후기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케테 콜비츠를 '슬픔의 성녀'로 기억한다. 민중예술가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 전체가 비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배경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고 행복했다. 콜비츠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의사인 남편 칼 콜비츠와 베를린에서 50년 넘게 깊은 신뢰와 사랑 속에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그가 젊은 시절 가난한 노동자와 소외된 이들을 화폭에 담았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천부적인 공감 능력 때문이었다. 당시 베를린 빈민가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남편의 곁에서, 그녀는 시대의 아픔을 목격하며 예술적 주제를 확립해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자화상은 정교한 기교와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완벽한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그녀의 예술과 삶을 영원히 바꿔놓는다. 1914년, 사랑하는 아들 페터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녀에게 슬픔을 넘어 존재론적 균열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콜비츠의 자화상에서는 불필요한 것들의 삭제가 시작된다.


더 이상 배경을 그리지 않았고, 화려한 명암이나 장식도 버렸다. 오직 굵고 거친 선, 그리고 숯의 검은 질감만이 남았다. 고통이 커지는 만큼 표현은 더 단순해진 것이다. 그녀는 삶의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들을 하나씩 벗겨내며 '고통의 뼈대'만을 남기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케테는 베를린 예술원에 입성한 최초의 여성 교수였지만, 나치 정권은 그녀를 강제로 퇴출시켰다. 그리고 7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에 공습을 피해 베를린을 떠나야 했던 그녀의 마지막 자화상들은 이제 한 개인의 얼굴을 넘어,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견뎌낸 인류의 얼굴이 되었다. 두 번의 전쟁으로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케테는 얼굴은 그만의 얼굴일 수 없었다.


지금 80년째 이어지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모르는 얼굴이다. 그래서 두 번의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통과한 콜비츠 세대의 절망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100여 점의 자화상을 순서대로 따라가다 보면, 한 예술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을 어떻게 보편적인 위로로 승화시켰는지 그 위대함을 깨달을 수는 있다.


그녀의 아들 한스가 말했듯, 케테는 '메시지 전달자'이기 이전에,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자신의 영혼을 숨 쉬게 할 수 있었던 뼛속까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내재한 고통의 기억, 부모로부터 유전자처럼 물려받은 세대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가슴에 깊은 울림이 오게 한다.


어머니를 향한 집요한 시선


케테의 예술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과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케테의 어머니는 첫 두 아이를 잃은 슬픔 때문인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신비롭고 먼'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아마도 더 이상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겪지 않겠다는 듯 그 이후에 태어난 세 아이들에게선 조금 비껴 서 있었다. 케테는 그런 어머니를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아련했다"라고 회상했다.


어린 케테는 어머니가 길을 잃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까 봐, 혹은 마음의 병을 얻어 정신줄을 놓아버릴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역설적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잃게 될 순간을 마음속으로 준비하며 살았다. 이 예민하고 생생한 상상력은 훗날 그녀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표현하는 강력한 공감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그 집요하고도 슬픈 시선은, 어쩌면 어린 시절 사라질 것만 같았던 어머니의 눈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그 간절함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은 사회참여적인 예술가는 이타적일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물론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술가란 본질적으로 매우 자기중심적인, 혹은 자신을 축으로 삼는 존재들이다. 자신과의 대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내면을 쌓아나간다. 내면에 아무것도 없다면 밖으로 나올 것도 없다. 케테 콜비츠가 남긴 100여 점의 자화상은 바로 그 치열한 내면의 탐험 기록이다.


타인의 고통을 그리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이라는 도구를 철저히 파고들었다. 자신의 불안, 자신의 슬픔, 자신의 노화를 관찰하는 그 집요한 '자기 몰입'이야말로 그녀가 세상을 향해 내뿜은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그녀의 예술은 단순히 남을 돕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안의 폭풍을 잠재우고 형상화하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필연적인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유일한 청동 두상을 완성하는데 1926에서 1936년까지 꼬박 십 년이 걸렸다. 잘 안된다고 투덜대면서도 포기가 안된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요즘 다시 내 입체 자화상에 매달려 저주하고 욕하며 (…) 하지만 놓지 못한다. 매일 새로운 환상으로 끝나고 다음 날은 우울한 노여움으로 시작한다. “ 거의 마지막 자화상이 된 이 청동 두상은 케테 콜비츠의 완벽주의와 자기비판의 증거품이다. 58세에서 69세 사이의 얼굴이 한꺼번에 다 녹아들어 있어 매우 복잡하다. 지금 이 청동 두상은 베를린 국립미술관, 케테 콜비츠 박물관 그리고 쾰른의 케테 콜비츠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열 번 이상을 부었다는데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K22_Kollwitz_Selbstbildnis-Bronze.jpg 베를린 콜비츠 박물관의 청동 두상. 10년 걸려 완성. © 2025 Käthe-Kollwitz Museum Berlin


1945년 4월 22일 전쟁이 끝나기 직전 만 77세 케테 콜비츠의 심장이 멈춘다. 결국 객지에서 눈을 감았다. 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지 몰랐던 것일까? 그래서 세상과 작별했을까?


만약에 케테 콜비츠가 살아남아 베를린으로 돌아갔다면 - 살던 집과 아틀리에는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지금은 콜비츠 공원 Kollwitzplaz이 들어섰고 공원 초입에 케테 콜비츠 할머니 상이 앉아 계신다. 베를린 조각가, 케테의 후배 구스타프 자이츠 Gustav Seitz 가 1951년에 빚은 청동상이다. 그 덕에 케테 콜비츠는 후세들에게 영원한 할머니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누군가 무엄하게 낙서도 했다.


젊고 행복하고 당당했던 서른 살의 케테를 만들어 세웠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때 그의 눈에서는 눈부신 섬광이 번득였고 그 타오르는 재능의 불꽃에 막스 리버만이 반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더 보고 싶은데 사람들은 왜 케테 콜비츠를 영원한 할머니로 기억하고 싶어 할까?


nt-12_1889_Koeln.jpg 케테 콜비츠 1889 뮌헨 미술대학 시절. 옷깃을 손으로 잡고 남학생처럼 당당하게 정면을 직시한 자화상. Käthe Kollwitz Museum Köln

Käthe Kollwitz Museum Köln


kn-273-iii-b_1938.jpg 마지막 자화상. 1951년 콜비츠 동상의 원형으로 쓰였다. Käthe Kollwitz Museum Köln


BLN_Prenzl_KollwitzPl_2008.09.06_JHG_14.JPG 베를린 콜비츠플라츠에 앉아 계신 콜비츠 할머니. ©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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