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을 향한 르네의 마음도 그와 같았다

르네 진테니스Renée Sintenis(1888~1965)와 베를린

by 고정희

하늘까지 자라고 싶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하늘까지 자라지는 못하고 180센티미터에서 멈췄다. 20세기 초 여성의 키로는 매우 커서 짧은 부기 커트에 양복을 입고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보통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사춘기 때 성적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 품었던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집으로 초대하는 남편감 후보들을 바라보며 하늘까지 크면 남자들이 눈길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은 르네의 취향이 아니었고 그 보다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를린 공예미술관 교육과정에 등록하여 조소를 배웠다. 미술대학(당시 왕립미술학교)에선 아직 여학생을 받아 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르네 진테니스Renée Sintenis(1888~1965)라는 이름의 베를린 조각가에 관한 얘기다.


Renée Sintenis. 1930년 Emil Rudolf Weiss 그림. ©Nationalgalerie Berlin. Public Domain


1900년대 초에, 베를린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예술가 중에서 작품으로 그리고 독특한 외모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이다.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베를린 예술원Akademie der Künste 조각 분과의 첫 번째 여성 회원으로 초대되었다. 예술원 전체로는 물론 케테 콜비츠가 1호 여성회원이었다.


나중에 나치가 등장한 뒤 베를린 예술원으로부터 탈퇴를 권고하는 편지가 날아 왔다. 르네의 답은 쿨했다. “내가 언제 회원 시켜달라고 한 적 있소? 그러니 탈퇴는 해당 사항이 없소. 당신들이 맘대로 임명한 것이니 제명하려거든 그것도 맘대로 하시면 되겠구려.”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컸는데 오히려 큰 키와 중성적 매력으로 남성 여성 모두 흠모하여 가장 많이 사진 찍힌 여인이 되었다. 본인이 예술가면서 다른 예술가들이 탐내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빚은 청동 자화상이 가장 뛰어난 것 같다. 시간을 두고 여러 개의 청동 두상을 만들어 자신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았다.


어린 동물의 친구


르네의 초기 작품. 어린곰. 1918년작. 후일 베를린 영화제 트로피의 모델이 되었다. ©Ludorff

르네 진테니스는 작은 동물을 즐겨 빚었다. “사람보다 동물에게 더 애착이 간다.”라고 서슴없이 말한 적도 있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랐는데 말을 가장 좋아했고 옆구리에 늘 강아지 몇 마리를 끼고 다녔다. 르네가 묘사한 동물은 모두 어리다. 막 태어나 풀을 뜯기 시작한 망아지. 풀밭을 뒹구는 강아지. 불과 13센티미터짜리 아기곰. 이 아기곰은 이제 막 두 발로 서기 시작했는지 양쪽 앞발을 내밀어 세상을 더듬어 본다. 이 아기곰이 후일 베를린 영화제 트로피가 되고 베를린 고속도로 지킴이가 된다.


르네는 커다란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카페에서도 파티에서도 늘 한쪽에 말없이 앉아 바라만 보았다고 한다. 마음이 퍽 따뜻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르네 진테니스를 따랐던 건 외모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따뜻하고 변함없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 번 마음을 열면 다시 닫지 않았다. 한창 전성기에, 집안일을 돌보러 다니던 젊은 여성과 평생지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중엔 무덤에도 같이 묻혔다.



베를린을 향한 르네의 마음도 그와 같았다.



르네의 다프네

동물상이 주된 작품세계였지만 여성상도 여러 점 남겼다. 그중 압권은 다프네 상이다. 아폴로 신에게 쫓겨 월계수 나무로 변신하는 찰나를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몸은 아직 그대로 있지만 머리카락만 월계수 잎으로 변했다. 높이 올린 양팔과 점점 길어지는 손. 르네가 어려서 품었던 생각 – 하늘까지 자라고 싶다는 – 이 포개지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신화 이야기를 낭만의 감성으로 읽는다. 그러나 르네의 다프네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무로 변하는 순간 겪었을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로 변하는 순간의 고통은 결국 식물과 사람 사이, 남성과 여성 사이,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 즉 양분화 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에 대한 고통을 말하는 듯 보인다. 무릎을 약간 굽히고 발끝으로 서서 두 팔을 높이 치켜든 다프네는 하늘로 솟구쳐 올라 변신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숙인 것은 물론 작품의 구도를 위한 것이겠지만 마지막으로 땅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자 함은 아닐까?


다프네는 1918년에 빚은 초기 작품에 속한다. 원래 30센티미터 남짓한 크기였다. 1930년 뤼벡의 갤러리에서 실물 크기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르네의 작품 중 금색을 칠한 유일한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은 거의 모두 30cm 남짓의 소형이기 때문에 소장하기에 간편하여 많이 팔렸다. 운동선수 연작도 있다. 움직임을 포착하기에 운동선수만 한 게 없다. 헤밍웨이가 베를린을 방문했다가 그녀의 운동선수 연작에 반해서 몇 점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녀 조각상은 동물, 인물 모두 거친 표면 처리가 특징이고 강한 움직임이 있다. 기념비적인 조각상을 혐오하였기에 나치의 미움을 받았다.

28163__Renee-Sintenis__Daphne__DSC2507.jpg 다프네 1930년 청동에 금도금. 현재 뤼벡 오버딕Overdieck 갤러리 소장.


1920년대~1930년대는 르네 진테니스의 전성기였다. 1933년 나치의 등장과 함께 그녀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외증조모와 증조부가 유대인이었기에 르네는 4분의 1 유대인으로 정의되었다. 그럼에도 외국으로 망명할 생각은커녕 베를린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937년에는 나치에게 ‘낙인찍힌’ 예술가 명단에 오른다. 그가 빚은 청동 조각의 표면이 거칠다는 것이 핑계였다. 독일제국의 청동상은 표면이 매끈하고 반들거려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르네의 쭈굴거리는 청동 자화상은 ‘망신스러운’ 작품으로 전시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베를린은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해갔다. 막바지에는 르네가 살던 집과 아틀리에가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수시로 관에 불려 가 유대인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걸 모두 견뎌냈다. 그러다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면 그것도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렇게 르네는 점점 베를린이 되어 갔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만든 자화상은 그때 베를린의 모습과 무척 닮았다.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신했다면 르네는 점차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하나가 되어 갔다. 전쟁이 끝난 뒤 작은 아파트를 배당받고 예술공로상도 받고 미술대학의 교수로 부름을 받아 생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곧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학생들은 허리가 구부정해진 커다란 여교수의 깊은 시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의 지옥을 건너온 르네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새로운 것을 찾는 전후 로큰롤 세대와 교감할 수 없었다.


르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은 아파트 작업대에서 어린 동물들을 빚었다. 작업에 열중한 르네의 흰 머리칼은 고전처럼 빛났고 이마와 얼굴의 주름 속에는 깊은 고독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SintenisP306-387x600-1.jpg 르네의 청동 자화상. 1923년 만 35세에. ©Gerog-Kolbe-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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