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하기 싫었을 뿐 늙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내가 꿈꾸는 은퇴생활
<송도 센트럴파크>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빨리 돈을 벌어 지긋지긋한 삶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난 그 탈출 방법이 은퇴라고 생각하고 그날을 기대하며 지금을 참고 살았다
은퇴 후 특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갑자기 은퇴를 하게 됐을 때는 아끼고 아끼던 특별한 삶을 만들어 줄 마음속 <싶다>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 계획도 없고 준비도 없이 50살에 백수가 됐다
몇십 년을 7시에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던 것이 몸에 뵈었는지 백수가 돼서도
기상시간은 어김없이 같은 시간이다
부족한 잠이 아쉬워 이불을 감싸고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느라 아침부터 우울했는데
이제는 더 잘 수 있는데도 깨는 잠에 우울하다
혼자 먹는 밥도 맛있다
난 식충인가?
이 상황에도 식욕은 왕성하다
불안함과 망막함을 음식으로 채우고 있나 보다
어렸을 때 TV에서 보던 연예인이 나이가 들어 방송에 나온다
세월이 뺏어 간 그의 외모는 연예인이 맞나 할 정도로 빛나던 외모는 온대 간대 없다
정동원가수의 여백의 가사가 생각난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늙어가는 게 슬프겠지
화려한 옷을 입어도 저녁이면 벗게 되니까>
젊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은 특별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외모를 빛나게 해 주던 화려한 옷을 벗으니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매일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는 어디를 바쁘게 가고 있을까?
그들 속에서 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이 낯설다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연속이다
내가 꿈꾸던 은퇴생활이 이런 거였나?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고 돈을 벌 때는 시간이 없고
늘 부족하고 모자란 삶을 살다 보니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현실이 되고 나니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창옥강사님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운동을 해보세요라고 조언했던 말이 생각났다
일이 많고 바쁘다 보니 따로 운동할 여유도 없었지만 운동을 하기 싫어하기도 했다
억지로 해 보려고 헬스장도 끊어 일 년을 꾸역꾸역 다니고는 지금은 그 마저도 안 한다
그 당시에도 운동이라고 해봤자 러닝머신에서 1시간 걷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그거라도 했던 건 헬스장 등록할 때 해본 인바디 결과 때문이었다
"이런 인바디 결과는 처음 보네요 혹시... 누워서만 지내시나요? 팔다리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요
걷기만 해도 다리에 근육이 없기란 쉽지 않은데..."
젊은 남자 트레이너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진짜 누워서만 지내게 되면 어쩌지?
겁이 났었다
그러나 그 겁도 일 년이 지나니 무디어졌고 코로나로 갈 수 있는 날이 점점 줄면서 아예 가지 않게 됐다
다시 시작해 보려니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내 모습은 마치 언젠가 키웠던 햄스터를 생각나게 했다
밤새도록 제자리에서 쳇바퀴를 열심히 돌리던 햄스터 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설쳤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시끄럽게 돌리던 쳇바퀴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엄마! 엄마! 햄스터가 없어!"
갇혀있던 사육장의 쇠그물을 비집고 도망친 것이다
집안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밤새 쳇바퀴를 돌렸던 것이 그 쇠그물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다이어트를 한 건가?
순간 밤새 돌리던 쳇바퀴가 탈출을 위한 계획이었나 싶어
그들의 처절한 노력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었었다
햄스터, 너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냥 공원을 걷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두 시간씩 걷기 시작했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려고 준비하는 공원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입사귀들로
길을 채워가고 있었다
서늘해진 바람이 길바닥에 얌전히 쌓여있던 입사귀들을 이리저리로 흐트러버린다
나뭇가지에 붙어 사정없이 흔들리던 잎사귀들도 사사삭 소리를 내며 맥없이 바닥으로 나뒹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면 머릿속은 공기로 빵빵하게 채워진 풍선이 된 것처럼
부풀어 올라 곧 터질 것 같았다
생각이 멈춰지지 않는다
온갖 잡생각이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계획도 없이 사는 나는 햄스터 보다도 계획이 없었구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 없는데?"
"그래? 다행이다... 근데 웬일로 전활 다 했어? 톡으로 안 하고?"
"운전 중이라 톡으로 못해"
갑작스러운 전화는 늘 좋은 소식보다 안 좋았던 적이 많았다
그런 전화는 벨소리부터가 오싹하다
똑같은 벨소리인데 띠리링 울리면 가슴이 쿵하고 먼저 반응한다
톡으로만 안부전활 하는 아들에게 전화가 오면 반갑다가도 걱정이 앞선다
걱정을 만들어서 할 시간이 많아졌다
며칠 전 10살 차이 나는 S원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만나지는 않고 가끔 전화나 주고받는 사이다
그래도 한번 할 때는 1시간 이상 수다를 떤다
일하기 싫어 죽겠단다 빨리 이 반복되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놈의 돈이 원수라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S원장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녀와 내가 동년배인 줄 착각할 정도로 우울한 증상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여행 갔다 왔어요 이번엔 필리핀으로요"
하던 공부방을 정리하고 이사를 했다
그리고 한 달 쉬는 동안 휴가를 갔다 온 것이다
"좋았어?"
"네 너무 좋았어요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요... 아무도 날 모르니까 더 좋더라고요"
"뭐야? ㅎㅎ 누가 들으면 연예인줄 알겠어?"
"그니까요... 밖에 나가면 누가 <선생님이다> 하고 알아보면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확!... 어쩌죠? 이사 와서도 다시 일 시작해야 해요 너무 하기 싫어요"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같으면 자유가 없다
"그럼 나이 40밖에 안 됐는데 일 안 하고 뭐 하려고?"
"여행이나 다니며 살면 좋겠어요"
누구나 자신만이 꿈꾸는 은퇴생활이 있다
하지만 은퇴는 준비도 못했는데 갑자기 닥친다
은퇴 먼저 하고 은퇴 준비를 시작해도 될까?
일하기 싫었을 뿐 늙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