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다정소감>을 읽고
책장에는 김혼비 작가가 쓴 책이 세 권 있다. <아무튼, 술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제철소, 2019), <전국 축제 자랑- 이상한데 진심인 K-축제 탐험기>(김혼비, 박태하, 민음사, 2021) 그리고 최근에 나온 <다정소감>(안온북스, 2021). 엄청 재밌게 읽은 그의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정작 책장에 꽂혀 있지 않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는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2018년 6월에 나온 책이고, 내가 처음으로 읽은 김혼비 작가의 책이기도 했다. 그가 쓴 축구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같은 팀 ‘언니’들과의 에피소드로 웃음도 났다가, 그들의 건강함에 감탄하기도 했고, 같이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고 싶어졌고(이제까지 축구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동안 왜 여성들이 축구라는 종목과 거리를 두며 살았는지 함께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위에서 그동안 김혼비 작가가 쓴 책 제목들을 보면 느낌이 왔을 수도 있지만, 김혼비 작가는 그동안 특정 소재로 한 권의 책을 풀어냈다. 축구, 술 그리고 축제. 술이야 내게 나름 친숙한 소재여서 더 공감하여 읽었다고 해도 축구나 축제나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소재였는데도 그가 쓰면 전부 다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정 소재로 묶이지 않은 책이 나왔다. 좋아하는 작가들이 다작하는 건 언제나 반갑고 좋은데, 특히 김혼비 작가의 다작도 언제나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글이 많이 담긴 책을! 그것도 <전국 축제 자랑>이 나온 같은 해에 내주다니! 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한 달 전쯤 안온북스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신간 출시 소식을 보고는 무척이나 기뻤다. 나오자마자 사리라 벼르고 별렀다.
김혼비 작가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그 서론이 길었다.
그의 글은 흡입력이 있다. 유머러스하다. 찰지다. 그렇다고 ‘웃기기만’ 한 글도 아니다. 글 전체를 이끌어가는 그의 주제의식은 가볍기만 하진 않다.
그리고 따스하면서도, 열려 있다. 열려 있고, 읽는 이도 열리게 만든다.
여기서 읽는 이들이 무엇이 열려있냐고 물어볼 것 같은데, 이 포인트에서 잠시 더 이어가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최근에 새삼 깨달은 건, 어떤 에세이를 읽는 건 그 에세이를 쓴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좋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말을 쓴 것 같은데, 최근 책장을 정리하다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의 에세이를 읽으며 이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뭔가 글에서 완전히 솔직하기보다는 ‘좋은 사람’인 느낌을 내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굳이 그렇게 ‘좋은 사람’인 척을 할 필요는 없는데. 좋은 사람이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안 되는 것에 대한 솔직함이 쓰여 있다면 오히려 더 공감하며 읽었을텐데... 어떤 상황에 대한 서술을 하고 마무리하는 방식에서도 다소 뻔하면서도 보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게 바로 도덕 교과서적인 결론인건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었는데, 만약 실제로 아는 사이였다면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이 사람의 글이 엮인 책이 새로 또 나온다면 굳이 사서 보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뭔가 ‘닫혀 있는’ 사람의 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은 척 하지만 알고보면 좀 닫혀있고 글의 결론도 닫혀 있고...
쓰다보니 결국 이건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 에세이 취향에 대한 이야기다.
에세이라도 생각을 트이게 만드는 글을 좋아한다. 생각이 트이게 만든다는 걸 앞에서 ‘열려 있다’고 표현해보았다. 꼭 어려운 내용이 아닐지라도. 쉽게 풀어내서 쓰면서도 ‘이건 내가 생각하지 못 했던 지점이네’라는 생각이 들거나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 글 덕분에 다시 마음에 새겨야지’라거나. 또는 아예 크게 웃게 만든다거나, 마음이 뭉근해지는 글. 눈물 펑펑 흘리는 감동은 아니지만 마음 한쪽이 약간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글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김혼비 작가는 이 모든 걸 다 해낸다. 그리고 특정 소재가 아니라, 다양한 소재에 대해서도 일상에 대해서, 추억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쓴다는 걸 이번 신간 <다정소감>을 읽으며 더 알 수 있었다. 이제 책 내용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 해보면.
<다정소감> 이라는 단어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읽으며 무슨 뜻일지 궁금했다. (홍보 문구에 자주 나왔으나, 김혼비 작가의 책은 굳이 홍보 문구를 안 보고 바로 샀기에...) 그러다 ‘에필로그’ <코로나 시대의 근황과 쓰지 않은 다정에 관하여>를 읽으며 알았다.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까지 할까 봐!”라고 덮어놓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줬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그래서 책 제목을 ‘다정소감’이라고 붙여봤다.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느낌도 좋았지만, 결국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인 것 같아서. 내 인생에 나타나준 다정 패턴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디자인에 워낙 재주가 없는 나에게 다정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다 그들의 다정을 되새기고 흉내 내며 얼기설기 패턴을 만들어간 덕분일 것이다.' (p.220)
이 모든 문단이 좋았다. 그리고 특히 밑줄을 긋는다면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인 것 같아서. 내 인생에 나타나준 다정 패턴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이 문장.
이 책에 실린 글은 정말, 그가 살면서 마주하고 경험하고 생각했던 온갖 다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두루뭉술하거나, ‘좋은 게 좋은 거야’라거나, 막 착한 척하기만 하는 그런 스타일의 글은 절대절대 아니다.)
제일 첫 번째 글은 <마트에서 비로소>. 책 소개글에 따르면 다정의 시작은 자기 자신인 셈이다. 나는 어떤 작가인가, 고민하던 그는 마트를 돌아다니다가 김솔통이라는 물건을 처음 마주한다.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래, 이거였다. 나는 갑자기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지구상의 중요도에 있어서 김도 못 되고, 김 위에 바르는 기름도 못 되고, 그 기름을 바르는 솔도 못 되는 4차적인(4차 산업혁명적인 게 아니라 그냥 4차적인) 존재이지만, 그래서 범국민적인 도구적 유용성 따위는 획득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 잉여로우면서도 깔끔한 효용이 무척 반가울 존재. 보는 순간 ‘세상에 이런 물건이?’라는 새로운 인식과 (김솔처럼) 잊고 있던 다른 무언가에 대한 재인식을 동시에 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그 인식이라는 것들이 딱 김에 기름 바르는 것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김솔통. 드디어 찾았다. 내가 쓰고 싶은 글. 두괄식을 만들어줄 첫 문장.
동네 마트에서 김솔통을 발견한 이날이 살면서 가장, 어쩌면 유일하게 작가라는 정체성에 가까워진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문장을 덜컥 써놓은 뒤로 5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써온 글들이 과연 김솔통과 비슷한지는 잘 모르겠지만(너무 대단한 물건을 목표로 찾았는지도......), 일단 오늘도 쓴다. 잘 보이지 않고 잊히기 쉬운 작고 희미한 것들을 통에 담는 마음으로.'(p.20)
읽으면서 ‘맞아, 맞아, 이미 김혼비 작가는 김솔통같은 글을 쓰고 있었네!’ 생각했다. 새로운 인식과 재인식을 동시에 하는 존재. 딱 김에 바르는 것만큼의 중요성을 지닌 존재라니. 역시... 그는 글에 대한 자의식이 비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면서 김솔통같은 글들을 썼다.
‘다정은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다짐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김혼비는 당장 김솔통이 되기라도 한 듯 그동안 만나왔고, 스쳐 지나갔으며, 동경했고, 아껴왔던 사람들로부터 얻은 감정들을 글에 담는다. 난생처럼 패키지여행을 떠난 중년, 맞춤법은 곧잘 틀리지만 삶에는 소홀함이 없었던 사람들, 나이 들수록 더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축구팀 언니들, 별생각 없이 써왔던 말에 상처받았을지 모를 어릴 적 친구…… 이 모두는 작고 소중하다. 모두가 다정스러운 소감의 빛나는 주인공이다.’(책 소개 중에서)
여러 글을 다 리뷰해보고 싶지만, 팬으로서 많은 이들이 <다정소감>을 사서 읽길 바라니까, 이중 몇몇 글만 말하고 싶다. <D가 웃으면 나도 좋아 -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없던 D라는 친구가 소외되던 순간을 목격한 김혼비 작가의 사유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고민과 실천. ‘당위’가 아니라 그의 생각이 나직하게 잘 적혀 있다. 나또한 글을 쓰면서, 말을 하면서 다른 이들을 배제하거나 소외하는 단어를 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지, 다짐해보았다.
‘의식적인 노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글은 모든 상황과 입장을 전부 담지는 못한다. 어느 한곳에서는 반드시 누수가 일어나 어떤 존재들은 빠져나가고 배제되고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표현’을 계속 고민하고 다듬는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D들이 삐쭉댈 만한 말을 최대한 쓰지 않는 것. 누군가 내 글을 읽다가 외로워지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것. D가 슬프면 나도 무척 슬플 것이다. D가 아프면 나도 무척 아플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써왔던 말들을 버리고 벼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p.126)
2부의 글 3편도 이야기 하고 싶다. 먼저 <문 앞에서 이제는>. 어린 시절 7년 내내 반장을 했던 이야기를 하며 그는 자신이 크게 리더십이 있지 않았으나 하나의 원칙은 고수했다고 한다.
‘내가 속한 반에서만큼은 겉돌거나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물론 ‘자발적 단독자’들의 의사는 존중했다). 이렇게 말하니 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아주 간단했다. 그냥 가서 같이 놀면 되는 거였다. 그러면 자연히 나와 친한 애들도 따라왔고 금세 다 친구가 되었다.’(130)
간단하게 적어두었지만, 사실은 이게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니, 학창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다들 공감할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따돌림 당하는 친구의 곁에 가면, 나또한 갑자기 순식간에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나에게도 친구들이 있어도. 그런데 김혼비 작가는 무심하면서도 따스하게 그런 친구들에게 다가갔고 그 중 한 명이었던 M에 대해 이 글에서 떠올린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M 옆의 빈자리에 가서 슬쩍 앉은 걸 알면 M은 질색했겠지만, 그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놀라느라 그걸 헤아릴 새가 없어 보였다. 정말 반갑다며 활짝 웃었다. 가로등에 일제히 불이 들어오는 순간의 강변 같은, 일순간 얼굴 전체가 환해지는 웃음이었다. 서로 할 이야기가 뭐 그리 많았는지 정신없이 웃고 떠드느라 예비 종을 지나고 5교시 시작 종까지 울리고서야 “갈게!”라는 다급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 교실을 향해 허겁지겁 뛰었다.' (p.133)
'그렇게 여섯 장짜리 편지의 후반부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음 장을 넘기다가, 첫 줄을 읽기도 전에 먼저 눈에 들어온 중간의 어떤 문장에 갑자기 숨이 멎는 듯했다. 거기엔 석 달 전 점심시간에 관해 적혀 있었다. 그날 얼마나 반가웠는지, 또 얼마나 기뻤는지. 올해 들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며 M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후로 어쩐지 점심시간마다 너를 계속 기다리게 됐어. 혹시 또 안 오나 해서.”
다시 읽어도 숨이 멎을 듯해서 바닥에 잠시 주저앉았다. 펑펑 울었다. (p.134)'
시간이 한참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M의 표정을 묘사한 부분, 이야기하며 즐거웠던 순간 그리고 M이 전학가며 남긴 편지를 읽으며 울었던 장면들까지... 읽으며 이 이야기에 훅 빠져들었다. 똑같지는 않더라도, 내게도 이런 친구가, 순간들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며.
다른 두 편의 글에서는 김혼비 작가를 향한 따스한 다정들이 담겨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먹먹했다. <비행기는 괜찮았어>에서는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할 때 이야기가 있다. 첫 비행 때 곤란에 처했던 그를 도와준 동료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 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중략)
요즘은 비행기를 볼 때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한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다른 여자들의 손을 빌리고 또 손이 되어주면서 우리가 계속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에 대해. 떠나간 여자들 뒤에 남은 이들은 어쨌거나 어디로든 계속 날아가야 하고, 서로의 비행을 응원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힘에 부쳐 주저앉아버린 순간에 문득 펼쳐볼 수 있는 다정한 기억들을 서로의 마음에 하나씩 쌓아 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비행기를 보면서 다정을 다짐했다.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집이어서 다행이다.'(p.152)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서로가 서로의 손을 빌리고 또 손이 되어주며 나아간 삶. 글을 읽으며 그 다정한 손들이 이미지처럼 떠올랐다. 나에게 다가왔던 다정한 손길들도.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글을 읽으면서는 2018년 퇴사했던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작가가 회사에서 새로운 부서의 상사로 인해 너무나 힘든 시기를 겪었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인데, 나의 경우 새로 왔던 편집국장이 1년 가까이 나를 면박주고 갈구었었다. 그 시절 엄청나게 주눅들어 있던 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의 눈빛이었다. 그는 늘 나를 세상 쓸모없고 성가신 사람 보듯 바라봤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눈빛들은 차곡차곡 내 눈 안으로도 들어와서 언젠가부터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 매일매일 규정되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라는 글자는 슬며시 사라지고 그저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서의 나만 남는다는 것을. 나에게조차 나는 성가시고 하찮았다.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었다.' (p.205)
이제는 3년이 지나서 눈물까지는 안 났지만, 스스로를 하찮게 바라보게 되는 그 과정을 담담히 적어둔 이 글을 보니 마음이 쓰렸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일상생활이 무너지던 그 때에 그를 힘나게 해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휴가 기간에 친구집에 가서, 지쳤는지 이틀 내내 내리 잠만 잤는데 그 이틀 동안 친구는 사골을 고으고 있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김혼비 작가에게 먹어보라고 건네던 친구.
'“나 좀 쩔지! 너 이거 먹으면 기운 확 날걸?”
의기양양한 J의 말과 함께 사골 육수에 기존의 라면을 합친 사리곰탕면이 식탁에 놓였다. 뽀얀 국물에 가려 면발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뿌연 눈물에 가려 국물도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솔직히 그날의 맛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신 기억나는 건 가게 앞에 쭈그러져 있는 풍선 인형에 바람을 넣으면 팽팽하게 부풀면서 우뚝 서듯 무너져 있던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일어나던 생생한 느낌. 한 입 두 입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 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틈새마다 눌어붙어 있던 자괴와 절망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쁜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J의 사리곰탕면이 새겨 넣은 메시지는 이랬다. ‘너는 누군가가 이틀을 꼬박 바쳐 요리한 음식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존재야. 잊지 마.’ 나를 따라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J와 함께 울며, 그리고 불며 싹 비워낸 한 그릇은 그렇게나 시원했다.' (p.210)
인생의 힘든 고비마다 곁에 함께 해 준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힘들었던 시기, 엄마가 아플 때, 엄마가 떠났을 때,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을 때, 건강상 문제로 수술을 받고 몸도 마음도 약해졌을 때...
J처럼 꼭 사리곰탕면을 만들어주진 않아도, 주위 사람들의 말 한 마디, 그리고 직접 만들어준 음식, 갖다준 음식, 함께 먹는 음식, 보듬어주는 손길들. 그런 순간들 덕분에 스스로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해낼 수 있었다. 다시 내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이틀 전에도 아빠로부터 택배상자를 받았는데, 장어국이 한가득 봉지봉지마다 담겨 있었다. 이번주 내내 그 장어국을 먹고 있다. 4시간을 고았다는 아빠의 말을 떠올리며. 두 달 전에, 장어국이 먹고싶다는 말에 곧바로 해주었던 아빠. 그거 먹고나니 체력이 좀 올라오는 것 같다고 하니 또 해주는 아빠. 아빠도 떠오른다.
‘하지만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힘든 시기가 어느새 저 멀리 지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J의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 덕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p.211)
읽으면서 가장 울컥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힘든 시기가 어느새 저 멀리 지나 있었다.’ 이 문장.
앞이 잘 안 보이는 황량한 사막에서 어떻게든 걷고 걷고 또 걷는 것처럼, 힘든 시간들 속에서도 주위의 다정으로 앞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다보니 어느새 그 시기를 지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란 생각이 들어서 울컥했다.
김혼비 작가가 써낸 '다정'들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해지고 든든해졌다.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다시 또 생각하게 되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도 더 깊어졌다. 그리고 위에 아빠 이야기도 잠시 썼는데, 아빠에 대해서는 크게 고마움을 잘 못 느끼는 편인데(가족마다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책을 읽고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아빠에 대한 고마움도 새삼 느끼게 됐다.
나의 '다정', 내가 생각하는 '다정'에 대해서도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다정'이라는 단어를 원래도 좋아했다. 다정한 글을 쓰는 작가들도. 다정한 사람들도. ‘다정을 느껴본 사람은 다정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니까.’ 라는 박준 작가의 추천사처럼 다정을 느껴본 그 덕분에 다정을 듬뿍 느꼈다. 앞으로도 살면서 많은 소중한 이들로부터 다정을 느끼고, 다정을 느끼게 하면서 살고 싶어졌다.
역시, 새로운 인식과 재인식! 김솔통같은 글을 쓰는 김혼비 작가 덕분이다.
+ 글을 마무리하려니 남는 질문. 나는 그럼 어떤 글을 쓰고 싶을까? 비유할 만한 사물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