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업디자이너로 다양한 사물을 디자인하고 있다. 업계 입문후 15년 동안은 기업의 인하우스디자이너로 전자 제품을 주로 디자인했다.
이 기간 동안은 많은 사물을 디자인했지만, 주로 전자제품으로 제한되었다. 전자제품은 현대인에게 필수품이라 시장도 크고 경쟁도 심했다. 글로벌 기업이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제품을 개발했고, 사용자조사 등을 목적으로 20여 개국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덕분에 같은 제품이라도 문화권마다 사용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예를 들면, 김치냉장고를 유럽에서는 와인냉장고로로도 사용한다.
같은 제품이라도 사람이나 문화권에 따라 소모품으로 또는 소장품으로도 다르게 정의된다. 전자제품은 기술의 발전과 부품의 조달에 따라 수명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내가 공들여 디자인한 제품이 전자페어나 백화점에 진열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지만, 수명이 다하여 분리수거 대상으로 나와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전자제품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투자금과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자금은 아이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전문인력등은 크게 차이가 없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 중심으로 개발한다.
예를 들어 TV제품을 개발한다면, 상품기획, 디자인, 설계 등의 전문가가 우선투입된다. 이후 QC, 양산, 마케팅, 영업 등의 전문가들이 담당한다. 전 과정 중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에 타격이 크다. 반대로 개발과 판매가 성공한다면 이익금을 차기제품 개발에 투입한다. 이렇게 선순환 시스템이 오래 유지되면 기업과 구성원들은 성장한다.
시스템의 산물인 제품은 출시, 사용, 폐기의 순서의 절차를 밟는다.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어도 결국 사용자의 결정에 의해 사라진다. 여기에 복병이 숨어있는데, 바로 생산과잉과 폐기문제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는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라나 개인들이다.
나는 디자인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의 분리수거장에서는 갈수록 좋은 제품들이 버려지고 있음을 목격한다. 앞으로 더 가속화 될 것 같다. 충분히 사용이 가능한 제품들도 여러 이유로 버려진다.
나는 전자회사를 떠난 이후로도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했다. 그중에는 패션제품이나 가구같이 부품이 필요 없는 제품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제품들도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버려지기는 마찬가지다. 전자제품은 고장이나 부품조달의 한계로 어쩔 수 없이 버려지나, 패션제품이나 가구등은 유행이 지나면 버려진다.
사물은 감정이 없다. 그래서 사물의 수명은 주인이 정할 수 있다. "그래도 '반려동물'은 생명체니 수명이 다할 때까지 주인과 함께하지않나?"
100여 년 전 유럽의 문학작품이나 기록들을 보면, 유언장에 일상의 사물들을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가구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불운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당시에는 '반려사물'의 개념이 있었다. 지금도 명품은 '반려사물'이다.
명품은 '금'처럼 가격이 어느 정도 매겨져 있기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지금 사용하는 평균적인 사물들도 100년 전에는 명품처럼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명품의 정의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가격적 가치와 상관없이 '자신이 애착을 갖는 사물이 명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