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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과 파이어족에 대한 소고

by 피터정

언제부터인가 '워라밸과 파이어족'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의 일상으로 다가왔다. 둘 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좋은 의미다. 우리나라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너무 일만 했기 때문에 개인의 삶도 챙길 필요가 있다는 것은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여과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좀 염려스럽기도 하다.

최근 드라마 서울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을 보며 나의 과거 회사생활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극 중 주인공 김부장 같은 사람은 내 주변에 많다. 이들 대부분은 회사에 속해있을 때는 워라밸 챙길 틈도 없이 산다. 그러다가 회사를 떠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런 스토리를 접하면 누구나 빨리 목표한 만큼 벌고, 조기은퇴하여 자아실현의 삶을 추구하자는 파이어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사회풍조로 부동산, 주식, 코인 등 근로소득 이외에 짧은 기간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로 몰리기도 한다.

나는 대기업에서 15년 동안 근무했지만, 워라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당시에는 워라밸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러나 일로 인해 쉬지 못해서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자발적 퇴사 후 15년 정도 사업을 할 때는 직장생활보다 일의 강도가 더 높았지만, 워라밸에 대한 간절함은 없었다.

그 이유를 떠올려보니, 나는 일에서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회사일과 개인일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회사일이 곧 내 일이니 근무시간과 업무강도를 떠나서 크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업을 할 때는 내가 창업하고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회사이니 당연히 일도 더 많이 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10년쯤 하니 몸은 힘들다고 조금씩 신호를 보냈지만 마음은 워라밸이나 파이어족으로 기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덕업일치'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남들이 볼 때는 생계형에 가깝게 느낄 수 있었겠지만, 나는 자아실현이라고 굳게 믿었다.

또한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한 나라의 왕이라고 생각한다면, 힘이 들어도 자신의 왕국을 이끌어나간다. 왕이나 지주는 중간에 퇴직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 대부분 법정정년에 은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지주였다는 것은 아니다. 지주로 착각한 것도 아니다. 직장에 속해있든 내 사업체를 운영하든 나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 회사일이 곧 내일이 되니, 워라밸 같은 단어들을 떠올릴 만큼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단어들을 초월했을지 모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내 지인들 중에는 '워라밸과 파이어족'을 초월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우직하게 자기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가끔 이들을 만나면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만족감이 높다는 것을 느낀다. 이들은 나이도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며 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좋은 자극을 받는다. 이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그래서 각자가 하는 일이나 분야, 그리고 세대는 다르지만 서로 잘 통한다. 이들은 주변의 유행을 그다지 추종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만의 스타일을 꾸준하게 지켜나간다. 시간이 좀 걸려서 더 발전된 스타일로 자리매김한다.

'워라밸과 파이어족'을 추구하는 삶은 어쩌면 당연한 인간의 욕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의 일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면 워라밸을 초월하고 이미 파이어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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