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전문직이라고요?
항상 그랬다.
공부 머리는 심각할 정도로 없지만 말주변은 놀라울 정도로 좋아서 경쟁률이 어마어마한 기숙사 학교에 합격하기도 했다. 근원을 따져보자면 초등학생 때부터 강박적으로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하루에 1권씩은 무조건 읽었고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책을 읽는 수준에 다다랐다. 그래서 그런지 내 언변은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기능 중에서 가장 최고의 능력이었다.
편입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대학에 들어갔지만 좋지 않은 학교와 학과, 미래가 없어 보였다. 여기서 인생이 망하지 않으려면 높은 성적을 받자고 생각해 주말마다 카페에 가서 공부를 했다. 4.2라는 성적은 어느 대학의 서류전형에서도 가뿐히 통과하는 수치였다. 서류만 통과하면 남은 것은 면접, 준비라고는 자기소개? 뭐 그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그 무렵의 나는 준비되지 않은 말들을 기상캐스터처럼 줄줄 늘여놓는 달변가였다. 그런 나에게 간호학과 편입이란 정말 쉬운 일이었다.
간호학과에 편입하고 나서 정말 놀라웠다. 학교의 학생들은 만족하지 않는 학교였지만 나는 새로운 학교가 너무 좋았다. 시골 구석 높은 곳에 있는 탓에 매일 등산을 해야 했지만 몇 안 되는 최첨단의 시설이, 학생들의 수준이 훨씬 나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정말 대학생활이라는 거구나 느끼면서 너무 행복했다. 비록, 누군가 말하는 인서울 스카이 중경외시 건동홍이라는 수험생의 사자성어로 불리는 학교 중 하나는 아니었지만 나름 그 지역에서는 인정받는 학교였고 이전의 학교와 수준이 달라졌기 때문에 나는 사람의 환경이 이토록 중요한 것인가 깨달으며 충만감에 젖어있었다.
넓은 강의실에서 열심히 눈을 빛내며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에게 교수님은 간호학과는 의료전문직이라며 간호사 뽕(?)을 가득가득 채워 넣었다. 한국에서 의료인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조산사로 총 5가지 직업밖에 없으며 그중 간호사와 조산사는 모두 간호사이기 때문에 간호사는 의료 전문직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조산사는 간호사 면허를 가지고 수습과정을 거쳐 국가시험을 통과한 사람을 의미한다.)
간호사가 되길 정말 잘했다! 의료 전문직이라니..!!
간호사가 되었으니 이제 밥 벌어먹을 걱정은 덜어도 되는구나
적어도 2학년 때까지는 내가 간호학과에 온 것을 만족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진짜는 병원에 실습 나가는 3학년 때 시작된다. 주로 3학년 때 간호학과 학생들이 휴학과 자퇴를 많이 하고 다른 길을 찾기도 한다.
내가 이 무렵 적었던 글을 오랜만에 펼쳐 보았다.
간호학과에 입학한 후 교수님들은 간호사는 4차 산업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을 전문직이라며
신입생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신다.
(법적으로 몇 없는 의료인에 속하지만 대우는... 그렇지 못하다.)
3학년 이후 가장 많은 휴학생이 생기는데
왜냐하면 3학년이 가장 공포스러운 실습이 시작되는 학년이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주입된 간호 뽕을 맞고
"나는 병원 가서 환자들에게 열심히 케어하고 도와드려야지"
하며 멋지게 간호하는 내 실습 모습을 상상했지만 이게 뭐지?
첫 실습지에서 나는 시 X 년이라는 소리와 함께 혈압계로 뺨을 맞았다.
아...
엄마가 말릴 때 오지 말걸
나는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다가 나왔다.
실습이 거듭될수록 자기혐오가 지속됐다.
어느 선생님은 내가 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를 역겹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그 표정이
그 순간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이름도 모르는 그분이 한 달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면서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짝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짝사랑이면 두근거리기라도 하지
(바쁜 상황에서 어리바리한 학생이 있으니 답답한 건 이해한다)
더 힘든 건 그런 상황은
그 순간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병원 속에서 간호학과 실습생이란 그저 간호사가 없으면 간호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학과 정원을 늘리는데 급급한 한국 상황 속에서 여러 대학에 간호 공장을 채우고 학과당 많으면 200,300명씩 뽑아서 밀푀유나베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
"그만둘 간호사를 대체할 새로운 인력"들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새로운 더 젊은 간호사로 대체하면 그만인 여러 명의 걸리적거리는 학생일 뿐이었다.
병실 청소 및 화장실 청소
네?
병실 소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서 모자란 인력을 학생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심지어
"학생~ 저기 환자가 흘린 똥 좀 닦아"
환자가 흘리고 간 똥을 닦으라는 선생님의 말에 항의하다가
나는 혼이 났다.
"우리 땐 다 그렇게 하면서 컸어!!!"
간호 학생에게 주어지는 멸시와 모욕감들은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병원에 가는 길이 지옥 같았다.
아직 간호사도 되지 않았는데 새벽 5시에 달려오는 저 버스에 치인다면 내가 병원에서 선생님께 폭언을 듣는 일도 없겠지?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왜 늘 화가 나있을까?
왜 우리에게까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서 온갖 핍박을 다 할까?
미래에 간호사가 된 우리는 저런 일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멍하니 서있으면서 의미 없는 의문들만 머리에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그 의문은 신규 간호사가 되면서 저절로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