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두운 성당으로 들어가

by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끄

by 김양훈

나 어두운 성당으로 들어가

알렉산드르 블로끄


나 어두운 성당으로 들어가

가난한 미사를 올린다.

거기 붉은 현수등의 희미한 반짝임 속에서

아름다운 부인을 기다린다.


높다란 기둥의 그늘 속에서

삐걱거리는 문소리에 몸을 떤다.

그런데 내 얼굴을 주시하는 것은

단지 빛나는 성상, 단지 그녀에 관한 꿈.

오, 내게 이 가사(袈裟)는 익숙하여라,

위엄 있는 영원한 여인의 옷자락이여!

저 높이 천장의 횡목을 따라 달리는

미소들, 동화들 그리고 꿈들.


오, 신성한 여인이여, 촛불은 얼마나 정겹고,

그대의 자태는 얼마나 큰 위로인지!

숨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나는 믿노라. 사랑하는 그대임을. (1902)


이명현 엮고 옮김. 러시아 현대대표 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창비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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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 (19)


러시아 상징주의의 정점이자 '시인의 시인'이라 불리는 알렉산드르 블로끄(Alexander Blok)의 초기 걸작, <나 어두운 성당으로 들어가>는 그의 첫 시집인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1904)』의 핵심적인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한 연애시를 넘어 당대 러시아 지성계를 뒤흔든 신비주의적 철학이 투영된 작품입니다. 시의 배경과 비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창작 배경: '소피아'를 향한 영적 갈구

이 시가 쓰인 1902년은 블로끄의 초기 시기인 '제1기'에 해당하며, 두 가지 결정적인 배경이 작용합니다.

∎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철학: 블로끄는 러시아 철학자 솔로비요프의 '성스러운 지혜(Sophia)'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우주의 무질서를 구원할 여성적인 신성, 즉 '영원한 여성성(Eternal Feminine)'이 지상에 현현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 류보피 멘델레예바와의 사랑: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딸인 류보피는 블로끄의 실제 연인이자 아내였습니다. 블로끄는 그녀를 단순한 인간이 아닌, '영원한 여성성'이 육신을 입고 나타난 존재로 신격화하여 숭배했습니다.


2. 시평: 긴장된 기다림과 신비로운 황홀경

고요와 어둠 속의 종교적 경건함

시의 무대는 '어두운 성당'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예배를 집전하는 사제라기보다,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가난한 수행자의 자세를 취합니다. '붉은 현수등'의 희미한 빛은 현실과 영계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며, 시인은 극도의 정적 속에서 '아름다운 부인'을 기다립니다.

감각의 전이: 실체와 환상 사이

시인은 문소리에 몸을 떨 만큼 예민해져 있지만, 정작 그가 마주하는 것은 실제 여인이 아닌 '빛나는 성상'과 '꿈'입니다.

∎ "단지 그녀에 관한 꿈": 기다리는 대상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 부재 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더 강렬하게 느낍니다. 이는 상징주의 문학의 특징인 '보이지 않는 본질에 대한 탐구'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지상의 사랑을 천상의 종교로 승화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나는 믿노라"라고 선언합니다. 소리도 형체도 없지만, 시인은 내면의 확신만으로 그녀의 강림을 믿습니다. 여기서 '그대'는 연인이자, 성모이며, 우주의 지혜인 소피아로 통합됩니다. 지상의 연애가 종교적 엑스타시(Ecstasy)로 치환되는 순간입니다.

3. 종합 평가

이 시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교과서와 같습니다.

∎ 시각적 대비: 어두운 성당과 붉은 등불, 금빛 성상의 대비가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를 구축합니다.

∎ 음악성: 원문에서는 반복되는 운율과 부드러운 자음을 통해 성당 내부의 울림과 은밀한 숨소리를 음악적으로 재현합니다.

∎ 역사적 가치: 훗날 블로끄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아름다운 부인'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데, 이 시는 그 비극이 시작되기 전 가장 순수하고 신비로웠던 찰나를 박제해 놓은 귀중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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