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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Apr 05. 2024

제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제주4·3항쟁 76주년⑬] 제주4·3 삼대폭한(三大暴漢)②

제주비행장 미군수송기 앞에서 기념촬영한 장교들. 뒷줄 오른쪽부터 9연대 한영주 작전참모, 미군조종사, 김정무 군수참모, 탁성록 정보참모, 앞줄은 미고문관과 안광수 경비대 작전과장

제주4·3을 겪는 동안 제주섬사람들은 ‘탁 대위’라는 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그는 1948년 6월, 11연대와 교체된 송요찬 연대장의 9연대 정보참모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탁성록은 그해 12월말 제주를 떠날 때까지 6개월 동안 즉결총살은 물론 생사람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집단학살극을 주도했다. 헌병에게 잡혀가면 살고,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죽는다는 말이 돌았다.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어 나갔다. 그는 제주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한 손에 쥔 염라대왕이었다. 

    

당시 제주도립병원 총무과 직원이었던 최길두 씨의 증언이 있다. “탁성록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 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패륜적 행위를 당한 사람은 강상유라는 여성이었다. 강상유와 친분이 있었던 강소희 할머니는 강상유의 죽음을 이렇게 증언했다. “얼굴이 고왔던 강상유는 명문가 집안에 시집갔으나 4·3당시 홀로 된 상태였었는데 탁 대위는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다가 어쩐 일인지 그녀를 죽였습니다.”     

이런 살인마 탁성록은 두 가지 놀라운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대중음악가였으며 아편 중독자였다. 탁성록은 1916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진주 등지에서 1930년대 후반부터 가요작곡가로 활동하였다. 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20일과 21일 이틀간에 걸쳐 일제 강점기에 삼포관이라 불리던 진주 동명극장에서 진주영사기술자동맹이 개최한 남선남녀콩쿨대회의 심사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의 대중가요 작곡가였다. 또한 새롭게 편성한 ‘탁성록 경음악단’을 이끌고 진주 등지에서 콩쿨대회가 열릴 때마다 연주활동을 했다.     


탁성록이 작곡한 노래는 ‘논개의 노래’, ‘진주의 노래’, ‘광야의 달밤’ 그리고 ‘유랑의 곡예사’ 등이 있다. 기막힌 것은 아편쟁이 살인마 탁성록이 작곡한 가요 중에는 ‘제주도 아가씨’라는 노래가 있다는 것이다. 부평초가 작사하고 가수 남일연이 부른 ‘제주도 아가씨’의 노랫말은 이렇다. 이런 인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일연이 부른, 탁성록 작곡 부평초 작사 <제주도 아가씨>

동백꽃 피는 달빛에 잠든 섬

물결에 자라난 제주도 아가씨들

뒷모양 긴 댕기 초록 치마에 콧노래 부르면 

고깃배 돛 우에 물새가 우네


동백꽃 피는 안개에 잠든 섬

물결에 떠도는 제주도 아가씨들

업수건¹⁾ 옥색 깃 분홍저고리 섬 속의 긴긴 밤

달 아래 모여서 그물을 짜네


동백꽃 피는 노래에 잠든 섬

물결에 깃들인 제주도 아가씨들

저우새²⁾ 저 멀리 시집간다면

뱃머리 붙잡고 상산³⁾과 이별을 섧다고 우네

註:1) 머릿수건의 경상도 방언 2) 파도 3) 한라산     


진주에는 일제의 눈을 피해 가면서 민족적인 애수와 서러움을 노래한 대중가요 예술인들이 많았다. 작곡에서는 이재호, 이봉조, 백영호, 이한필 등과 가수로는 남인수가 있다. 살인마 탁성록은 1950년 육이오 전쟁이 터지는 해에 고향 진주에 돌아와 다시 학살을 저지른다. 풍류와 예술의 도시 진주에 ‘보도연맹학살’이라는 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음악가 활동을 하던 시절의 탁성록

대중음악가였던 탁성록은 음악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해방 후 해군군악대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후 군악대장을 거치며 국군 장교로 특채되었고,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로 제주로 들어오게 되었다. 9연대 정보참모는 제주4·3 당시 토벌군의 핵심간부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이때 9연대의 군수참모로 탁성록과 함께 근무했던 김정무 대위가 훗날 밝힌 증언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탁성록은 마흔이 다 된 사람인데 정보참모의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악대에서 나팔 불던 놈인데 어떻게 특채됐는지 나보다도 먼저 대위를 달았어요. 이런저런 구실을 달아 여자들 성폭행을 많이 했어요.”     


한편 놀라운 일은 탁성록이 마약중독자였다는 사실이다. 제주도립병원 경리 주임이었던 하두용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탁성록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 소위 아편 주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라 약제과장을 불러와 결재를 받고 주사를 놔 주었습니다. 그는 팔에 주삿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아편쟁이였어요. 안정숙 간호원이 팔뚝에 주사하려 해도 주삿바늘이 들어가지 않자 겨드랑이 밑에 꽂으라고 하더군요.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찾았습니다.”   

  

또한, 당시 9연대 장교였던 김정무(金貞武) 예비역 소장은 자신이 겪었던 탁성록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포로수용소는 농업학교 뒷마당에 천막 스무 개가량을 쳐서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연대장이 시찰한다기에 난 참모로서 따라나섰지요. 그런데 산에 있었으면 얼굴이 탔을 텐데 수감자 중에 얼굴이 하얀 사람이 눈에 띄는 게 아닙니까. 이상하다 싶어 물어보았지요. 오창흔이라는 의사인데 그가 하는 말인즉슨, “탁성록 연대 정보참모가 아편 주사를 놓아달라기에 거절했더니 잡아넣었다”라는 겁니다. 나도 이북에서 공산당이 싫어 월남해 군대에 들어온 사람이지만 이런 놈은 가만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총을 들고 탁성록을 찾아가 “야, 너 왜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드느냐. 이따위로 하면 죽여버리겠다.”라고 하니까 그때야 석방했습니다. 오창흔 씨는 석방된 후에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나만 따라다니며 군의관이 될 수 있도록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서울 육군본부에 가서 의무관에게 부탁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그 후 오창흔 씨는 겁이 나 제주도로 가지 못하고 부산으로 가서 ‘오 소아과’를 차려 운영했습니다.“  

   

4·3 발발 직전 조천지서에서 발생한 고문치사 사건의 피해자 사체를 검안해 사실대로 밝힌 의사 장시영은 경찰의 보복을 피해 부산에서 의사 생활을 할 때 군을 제대한 탁성록이 병원으로 찾아와 '살려달라'면서 모르핀을 간청했다고 증언했다.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 1948년 가을부터 제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도 대거 수용되었다

1949년 12월 12일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수용됐던 법조계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이 처형을 주도한 인물이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卓聖綠) 대위였다. 군 수사 당국은 법조계 프락치에 의심을 하던 중 이재만 검찰관 대리가 잠적하여버렸다. 그러자 군 수사대는 최원순 법원장, 김방순 검찰관 대리, 송두현 법원 서기장, 김진영, 양성두, 홍인표 등 법원 직원을 농업학교 천막수용소로 끌고 와서 최원순 법원장만 석방하고 나머지는 모두 즉결처분해 버린 것이다. 도망갔던 이재만 검찰관 대리는 금덕리 위 노꼬메 오름 굴속에서 잡혀 광령리 ‘왜왓’에서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수용자들(1948. 11)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에 수용됐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탁성록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천막수용소에 구금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문턱에서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다. 밤중에 호명 당해 나가는 사람은 다신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탁성록 대위와 강 현 ‘서청’ 정보부장에 의해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아침 탁 대위가 인원 점호를 했다. 탁 대위는 작은 키였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그는 매일 권투연습을 했다. 그가 수용소 천막 안에 들어오면 재빨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야 했다. 수감자들을 쓱 훑어보다가 누군가를 지목해 욕설하면서 발길질을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부하들이 해당자를 즉각 끌고 가 처형했다. 어떤 수용자는 공포감을 못 이겨 정신착란을 일으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 새끼, 조용히 못해!’ 하는 경비병의 고함과 동시에 구타와 비명이 터졌다. 아침에 집합해 나가보면 천막 앞 무덤 부근에 시신이 나뒹굴었다. 생지옥이었다.      


상급자들이 아편쟁이 마약중독자를 국군 장교로 계속 두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하는 잔혹한 살인 기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섬사람들은 이런 살인마를 피해 숨을 곳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산으로 도망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0년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던 해 진주로 돌아와 소령 계급장을 달고 특무대장(진주CIC파견대장)을 지냈다. 그는 진주에서도 제주 시절 못지않은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개전 초기 진주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학살극’을 벌이며 악명을 떨쳤다. 1950년 7월 15일경부터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진주경찰서 유치장과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이 사람들은 7월 21일부터 7월 26일까지 진주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등지와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 등지에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에는 최소 100여 명, 진주형무소에는 최소 20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되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주형무소 재소자의 희생자까지 포함한다면 진주에서는 모두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가해 집단은 진주CIC파견대와 헌병대, 진주경찰서, 진주형무소 특공대 등이다.     

 

살인마 탁성록은 철저하게 망가질 대로 망가진 끝에 어떤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불명예제대를 당한 뒤 종적을 감췄다. 그의 말로가 궁금하지만,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2018년)


그 작곡가는 어떻게 살인마가 됐나-탁성록(卓星祿) 이야기 <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 일반칼럼 < 기사본문 - 논객닷컴 (nongaek.com)

제주도 토벌에 나섰던 경찰과 서청단원,군인을 격려하는 이승만
초토화작전 직전인 1948년 10월 제주를 방문한 채병덕 참모총장 일행. 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 송요찬 연대장, 채병덕 참모총장, 열두번째 키큰 이가 서종철 부연대장.
제주를 시찰한 정일권 경비대 총참모장(오른쪽). 김영철 해안경비대 참모장(중앙)이 9연대 송요찬 연대장과 함께 삼성혈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48. 10. 1)
19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무장대로 가장한 2연대 특공대. 왼쪽 아래에 ‘暴徒로 假裝코‘ 라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1949. 1)
제주도 해안마을마다 무장대를 막기 위해 돌담으로 성을 쌓았다(1949. 1)     제2연대 제주도주둔기」 앨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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