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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철 대위와 유지사건

[제주4·3항쟁76주년] 4·3 삼대폭한(三大暴漢) ③

by 김양훈
신인철 대위와 유지사건(有志事件)

1948년 제주4·3참극이 벌어지고 2년이 지난 후, 6·25전쟁이 터졌다. 1950년 7월 어느 날 제주계엄사령부인 신인철 대위의 제주해병대 정보참모실에 밀고가 하나 들어왔다. 신인철 대위가 수사한 바에 따르면 피의자들은 1950년 7월 10일 홍순원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최남식을 비롯하여 각부서 별 임원을 선정하고 가입 1만 원씩 거둘 것을 결의하였다는 것이다. 이 비밀회의는 7월 14일부터 8월 5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군‧경‧관 요인암살대를 조직하고 암살 대상자 선정을 모의하였다는 것이다. 신인철 대위는 이 밀고에 따라 제주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법원장과 검사장, 그리고 제주읍장을 비롯한 제주의 유지 21명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제주경찰청의 전신인 제주경찰감찰청의 4.3당시의 모습, 문 밖으로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

충격에 빠진 시중의 민심은 달랐다. 구속된 기관장의 면면을 보면 북한군대가 낙동강까지 쳐들어 왔다고 하여 곧바로 ‘환영대회’를 준비할 만큼 약삭빠른 행동을 모의할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중대한 음모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당시 김충희 제주도지사는 이 사건이 특정인을 구속하기 위한 모함으로 보고 이성주 경찰국장과 협의하여 진상을 밝혀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중앙부처로 보냈다. 또한, 공병순 제주지구 CIC 대장도 이 사건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국방부로 보냈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지조사를 위해 내무부에서 선우종원 치안국 수사지도과장이 제주에 급파되었다. 결국, 8월 28일 군경 합동수사대가 구성되고 현지조사가 시작되었다.

초토화작전 직전인 1948년 10월 제주를 방문한 채병덕 참모총장 일행. 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 송요찬 연대장, 채병덕 참모총장, 열두번째 키큰 이가 서종철 부연대장.

군경 합수대에서 작성한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제주농업중학교 음악교사이자 교감으로 재직하던 강계돈이 1948년 7월경 서귀포국민학교 교장으로 전근 발령된 데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강계돈은 제주 4·3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도에 파견된 해군 정보장교 신인철 대위가 자기 집에서 하숙함을 기화로 허위사실을 고발하여 제주도 우익인사들을 감옥에 보냈다는 것이다. 군경 합동수사대는 강계돈을 ‘모략분자’라고 기록해 놓았다. 사건 당시 강계돈은 마흔 살이었으며 신인철 대위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이 사건은 ‘모략’에 의한 실체가 없는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취조과정에서 장용문이 잔혹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고, 김재천 제주지방법원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국무총리실에서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유지(有志)사건>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계돈의 무고로 인해 김재천 제주지방법원장, 원복범 제주지방 검사장, 김차봉 제주읍장, 홍순원 제주도 총무국장, 전인홍 제주도 지방과장, 이인구 전 제주도 사회과장, 김대홍 제주도립병원장, 백형석 제주 적십자사 지부장, 최남식 제주 농업중학교 교장, 조규환 제주농중 훈련교관, 한상용 제주농중 준교사, 최원순 변호사, 김무근 변호사, 이윤희 제주 조흥자동차부 대표, 김영희 주정회사 사장, 장용문 총후보 국회서기 등 16명이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나중에 억울함이 모두 밝혀져 죽음의 문턱에서 풀려났다.


강계돈은 1950년 9월 9일 국가보안법 제6조 및 계엄법 위반으로 기소돼 1951년 4월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강계돈은 대구고등법원에 공소하여 전쟁 와중인 1952년 1월 15일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고향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섬나라 제주와는 등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법기관의 판결은 판결일 뿐이다.


1951년 11월 대구고법에 항소한 끝에 다음 해 1월 15일 무죄로 풀려난 강계돈 교감은 한 달 뒤인 2월 26일 제주신보 광고란에 아래와 같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여 눈길을 끌었다.


"강계돈은 20여 년간 교육에 헌신해오면서 4.3사건 당시에는 주위의 협박과 신변의 위협을 받아가면서도 생명을 내걸고 불철주야 교원 및 학생선도와 교실 방화방지에 주력해왔다.


유지사건에 본인이 관련된 것처럼 떠드는 것은 자신을 영원히 매장하려는 암계에서 비롯됐음을 밝힌다.


신인철과 동거한 것이 그 이유라면 언어도단이고 추호도 양심의 가책이 없다. 고등법원의 신성한 법정에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청천백일하에 무죄판결을 받게 될 때 혈루(血淚)를 금치 못했다"


<蛇足> 이 사건의 밀고자로 지목됐던 강계원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아버지다. 강금실 씨는 2015년 1월 8일 <제주의 소리>와의 인터뷰 말미에 이 ‘유지사건’과 관련해 스스로 말을 꺼냈다. "어릴 때부터 4·3의 얘기를 듣고 자랐다. 저는 뼛속까지 제주도 사람이다. 아버지는 '유지사건'에 연루돼 무고죄로 구속됐다가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저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는 무죄 기록을 공개적으로 기록해서 명예를 회복시켜준 제주도와 제주도민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현임종 칼럼]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제주도 유지사건

2016년 9월 23일 <뉴스 제주>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시작한 북한 공산군은 우리에게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남하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는 보도를 듣게 되고 제주도민들도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1950년 8월 1일, 느닷없이 제주도 내 기관장과 유지들을 계엄사령부 정보과에서 구속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더구나 구속된 기관장과 유지들의 면면을 보면 제주읍장 K씨, 제주지방 법원장 K씨, 제주지방 검사장 Y씨, 도청 국. 과장. 변호사, 지방유지 등등이었으니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떠도는 구속 이유가 『인민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회합했다는 것이다. 제주4.3사건 때 계엄령으로 크게 시달림을 받아온 제주도민들이었기에 치열한 전쟁상태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이 시국에 누구도 이 문제에 앞장서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인민군 환영 준비위원회라니…. 그렇지만 구속된 기관장의 면면을 보면 그런 약삭빠른 인물들이 결코 아니었으므로, 무언가 중대한 음모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론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엄령 시국이라 일사천리로 사건은 처리되어 바로 총살형에 처해질 위기에 빠지니 모두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천주교 제주성당(지금의 중앙성당)신도회장 홍완표 씨와 정화의원 원장 최정숙 여사가 도내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께 사태의 심각성을 말씀드렸다. 미8군 종군신부 자격을 겸하고 있던 제주성당 주임신부인 아일랜드 출신 손 신부님(더손)과 제주성당 보좌 겸 서귀포 서홍리 주임신부인 라 신부님(라이언 토마스)가 바로 그분들이다. 신부님들은 외국인 신분임을 이용하여 로마교황청 주한대사관에 이 사태를 보고하여 외교적으로 문제를 수습해 보도록 권유하였다.


신부님들은 즉시 행동에 옮기셨고,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천주교 신자인 선우종원 과장을 제주도로 급파하여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계엄령 하여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선우종원 씨는 신분을 엿장수로 위장하여 제주도에 들어왔고, 도착 즉시 성당으로 신부님들을 찾아뵙고 관계자들을 만나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듣게 되었다.


며칠간의 조사를 끝내고 상경한 선우종원 씨는 관계부처의 협조를 얻어 제주계엄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 대위와 제주농중(당시는 6년제) 교감 K씨를 중앙군법회의에 구속 기소하였으며, 구속되었던 제주지역 유지들은 사형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석방되는 행운을 얻었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건의 진실은 교원인사발령에 불만을 품은 제주농중 K교감이 평소 친하게 지내는 정보과장에게 제주지역 유지들이 인민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모임을 가졌다고 거짓 정보를 제공하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모가 알려지자 제주도민 모두가 어이없어했다. 아무리 교원인사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엉뚱한 거짓말로 기관장과 유지들을 고생시키고,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으니, 교육자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몇 년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대법원까지 올라가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미 고향인 제주에서는 그가 저지른 파렴치한 거짓말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다시 고향 땅에 발붙이지 못한 채 제주와는 등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지들이 수감되었을 때 벌어진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유지 L씨와 K씨를 대질신문하였다. 취조관이 K씨에게,


“L씨는 인민군 환영 준비위원회 모임을 가졌다고 하는데, K씨 당신은 아니라고 주장하니 어느 말이 맞는 것인가?” 하고 호통 쳤다.


K씨는 L씨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라고 불같이 성을 냈고, 이미 고문에 지친 L씨는 K씨에게 “적당히 그렇다고 하고 넘어갑시다.” 하고 말했다.


양팔을 뒤로 묶인 채 끌려와 꿇어앉아 있던 K씨는 욱하는 성질을 참을 수 없어 L씨를 한 대 때리고 싶었으나, 몸이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한 가지 꾀를 내었다. K씨가 묶인 채로 앉아 있으면서 몸을 움찔움찔 움직여 L씨 쪽으로 가까이 가더니만, 갑자기 L씨의 코를 이빨로 물어뜯었다. 그러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갈을 외친다.

“남자 새끼가 죽을 때 죽더라도 바른말을 하거라!”


유식했던 L씨는 고문에 시달려, 어떻게든 사건을 빨리 종결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는 허위진술을 하였고, 무식하다고 소문난 K씨는 L 씨의 코를 물어뜯으면서까지 끝까지 허위진술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유식하고, 무식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이 극한상황에 다다랐을 때라야 그의 진실된 인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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