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고미숙 외 2인이 엮고 옮긴, 박지원 著 열하일기(上)

by 김양훈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약전(略傳)①

연암 박지원. 보다시피 덩치가 좀 큰 편이다. 눈매도 매섭고 목소리도 커서 한번 입을 열면 담장 너머까지 울렸다고 한다. 양기가 세서 만년에 면천군수를 할 적엔 연암이 목소리만 듣고도 귀신이 달아난 일까지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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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 13년(1737년) 서울 서소문 밖 야동(冶洞)에서 노론 명문가 박사유의 막내로 태어났다. 열여섯, 이팔청춘에 전주 이씨와 결혼한 후, 장인어른(이보천)과 처삼촌(이양천)의 지도하에 학업에 정진했다. 처가 역시 노론 학통을 계승한 명문가. 한마디로 출신성분은 ‘빵빵한’ 편이다. 하지만 양쪽 집안 모두 ‘청렴’을 가문의 영광으로 내 거는 바람에 평생 가난이 떠날 날이 없었다.


젊은 날의 특이한 사건이라면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 연암처럼 ‘양기 충만’한 인물이, 그것도 한창 팔팔할 나이에 왠 우울증이냐고? 그게 참모를 일이다. 좌우지간 어느 날 우울증이 그의 청춘을 덮쳤고, 그때부터 그는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꿀꿀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 연암은 거리로 나섰다. 거기서 분뇨 장수, 이야기꾼, 도사, 건달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그들의 기이한 인생 역정에 귀를 기울였고, 그러면서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되었다.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다. 그는 당시 선비들의 무능과 부패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오죽하면 「양반전」같은 과격한 작품을 썼겠는가. 그런 썩어빠진 양반들에 비하면, 비록 신분이 미천하고 험궂은 일에 종사하긴 하지만, ‘거리의 친구’들은 훨씬 기상이 맑고 드높았다. 그때 이후 연암은 뜻만 맞으면 이 세상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질병이 가져다준 멋진 선물!


더 결정적으로, 그때 이후 연암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탈주해 버렸다. 물론 그가 과거를 포기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개입했을 터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정국, 아수라장으로 변한 과거 시험장, 절친한 친구들의 정치적 희생 등등.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결정적인 원인이라 하기는 뭣하다. 굳이 따지자면, 체질적으로 격식에 갇히는 삶을 지독히도 싫어한 탓이라고 할밖엔. 남들은 수천 수를 짓는 한시를 그는 고작 50여 수밖에 남기지 않는 걸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고미숙 외 2인이 엮고 옮긴, 박지원 著 열하일기(上)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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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약전(略傳)②

부(富)도 명예도 없었건만, 그래도 30대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는 벗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북학파의 핵심 멤버인 박제가와 이덕무, 천재 과학자이자 음악가인 홍대용, 괴짜 발명꾼 정철조, 조선 최고의 창검술을 자랑한 백동수 등이 그의 자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삼십 대 중반 즈음, 연암은 식구들을 처가로 보낸 뒤 전의감동(典醫監洞)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이끌었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은 매일 밤 모여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북벌(무찌르자 오랑캐!)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북학(청나라 문명을 배우자!)의 기치를 내건 것도, 고문의 매너리즘을 벗어나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글쓰기를 실험한 것도 다 이 향연의 산물이었다. 벗이 있었기에 진정 행복했고, 벗이 있었기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때, 그들을 사로잡은 윤리적 강령은 오직 하나, “벗이란 또 다른 ‘나’다.”


하지만 백탑에서의 빛나는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776년, 우여곡절 끝에 정조 임금이 즉위하게 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홍국영의 세도가 시작되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그 불똥이 급기야 연암에게까지 튀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가정 형편 역시 좋지 않았다. 그즈음 그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나고, 그간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 왔던 형수님마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먹고살기가 막막해졌다. 이래저래 연암은 도주하듯 개성 부근에 있는 ‘연암골’로 들어가야 했다. 그때 그이 나이 마흔두 살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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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약전(略傳)③

2년 뒤, 홍국영의 실각과 더불어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화근은 사라졌지만, 옛 친구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벗과의 교유도 세월의 무상함을 피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1780년,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던 차,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연암을 도안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생애 가장 큰 행운이자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인 ‘중국 여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장장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의 기록이 바로 그를 불후의 문장가로 만들어 준 『열하일기』다. 책을 내자, 천고에 드문 문장이라며 열광하는 ‘폐인’도 많았지만, 책을 불태워버려야 한다며 난리를 더는 ‘안티팬’들도 적지 않았다.


급기야 1792년, 정조는 문체반정을 주도하면서 문체를 어지럽힌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는 그저 중원 천지에서 마주친 ‘말과 사물’들의 웅성거림을 세상에 전달한 전령사였을 뿐인 것을.


나이 쉰이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랐다. 무슨 특별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고, 순전히 호구지책이었다. 면천군수, 안의현감 같은 것이 그가 노년에 쓴 감투들이다. 하지만 그것도 양양부사릏 끝으로 마감하고, 다시 서울 가회동으로 돌아와 말년을 보냈다. 1805년, 풍증이 찾아오자, 연암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약을 물리친 다음, 친구들을 불러 조촐한 술상을 차려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언은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것뿐. 그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는 묘비명의 대가였다. 그의 묘비명들은 생의 빛나는 순간을 압축함으로써 망자를 전송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에 대한 묘비명은 쓰이지 않았다. 만일 그가 허락해 준다면, 나는 그의 어법을 흉내 내어 이런 묘비명을 바치고 싶다.


“이질적 존재들의 시끌벅적한 향연을 즐긴 에피쿠로스를 닮았고,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우정의 정치학을 설파한 건 스피노자를 닮았으며, 웃음이야말로 삶과 사유의 동력임을 보여 준 것은 니체를 닮았으며, ‘투장과 비수’의 아포리즘으로 통념의 기반을 가차 없이 뒤흔든 건 루쉰을 닮았구나!” ■고미숙 외 2인이 엮고 옮긴, 박지원 著 열하일기(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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