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주의자와 사실주의자

-로라 커밍 著 <화가의 얼굴, 자화상> p291~293l

by 김양훈
쿠르베의 파이프를 문 사내, 캔버스에 유채, 45x37cm

쿠르베는 파리 코뮌에 참여한 죄목으로 징역을 살았다. 그의 요란한 편지와 여러 편의 글에서 그의 정치적 색깔이 무엇인지 하나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가 공화주의자로서 1848년 혁명기에 보들레르의 좌파 잡지를 위해 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제2제정 내내 나폴레옹 반대자로 활동했고 사회주의 철학자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 그의 멘토였다는 것도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쿠르베는 코뮌 시기, 공식 살롱의 부패와 추잡함을 종식하는 책임을 맡은 위원회를 주도했을 때를 제외하면 활동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다. 이런 미미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코뮌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감금되었는데, 보수파의 적들은 이것이 너무도 무른 처벌이라고 비난했다. 관학파 화가인 장 루이 에르네스트 메소니에는 만일 쿠르베가 처형될 수 없다면 대신 화가로서라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그림은 공공 전시에서 철저히 금지되었으며 그는 30만 프랑이라는 돈은 쿠르베가 파괴했다고 잘못 알려진 제정의 정신, 방돔 기둥을 재건하는데 드는 비용이었다.

오르낭의 매장

쿠르베의 정치 성향에 대한 적대감이 그의 예술에 대한 혹평을 부채질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못난’ 도시인에 대한 혐오와 ‘구세주인 체하는’ 자화상에 대한 조롱, 그리고 나폴레옹과 같은 장군 대신 농민을 웅장하게 그린 것에 대한 비난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쿠르베는 경험주의자였다. 그는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난 한 번도 그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진실은 그가 직접 관찰한 것일 때만 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신을 매장하는 오르낭 마을의 성실한 주민들이나 황무지에서 돌을 깨며 근근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진실이었다. 쿠르베는 1855년 <사실주의 선언>에서 “사실주의자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떠안겨졌다”라며 사실주의자라는 말에 대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분명히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과거에 대한 거부가 당대 미술의 주제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시대착오적인 여신과 님프, 신고전주의 회화에 넘쳐났던 영웅들은 당대 미술의 주제가 될 수 없었다.

돌을 깨는 사람들

정연하고 감성적이며, 고상하고 이상적인 이미지에 익숙했던 관객은 무덤처럼 어두운 길고도 낮은 화포 안에 무질서하게 늘어서서 슬퍼하는 사람들의 행렬에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오르낭의 매장> <돌 깨는 사람들> <목사님의 귀환> 등 그의 유명한 그림들은 모두 살롱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나막신을 신거나 거름 범벅을 한 작업복을 입고 있는 쿠르베, 목이 잘린 돼지 머리를 그리거나 트레이드 마크인 턱수염 끝을 붓 삼아 작업하는 쿠르베 등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신문 풍자만화 난을 채웠다. 그의 그림이 캐리커처나 조롱거리로 오랫동안 다뤄지기는 했지만, 쿠르베의 얼굴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쿠르베의 작품을 한 점도 보지 않은 사람들도 그의 특징만은 알아볼 수 있었고 파리에서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그만큼 국제적으로 알려진 예술가의 얼굴은 없었고, 앤디 워홀만이, 그것도 방송 매체의 도움으로 그 정도의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로라 커밍 著 <화가의 얼굴, 자화상 A Face to the World> (뒤러부터 워홀까지 자화상으로 그린 화가의 진실)

화가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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