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항(密航)⑦

구엄리 이야기

by 김양훈
가네다 카츠히로의 댄스

밀항으로 불법체류자 신세인 아버지는 가짜 일본인 '가네다 카츠히로(金田勝弘)'로 위장하고 일을 쉬는 날이면 무료한 시간을 독서와 여행으로 보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새로운 취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볼룸댄스(Ballroom Dance)였다. 볼룸댄스는 세계적으로 공통된 도법(跳法)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춤이다. 우리는 '사교춤'이라 하고 서양말로는 ‘Dance’, 그리고 일본에선 ‘무도(舞蹈)’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사교춤을 종주국 영국에서는 ‘Ballroom Dance’라고 부른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댄스를 시연하는 아버지 가네다 카츠히로, 1985년 오사카

아버지는 취미로 시작한 이 볼룸댄스에 오랫동안 흠뻑 빠졌다. 편지마다 춤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귀국하면 며느리는 물론 사돈인 장모님에게도 춤을 가르쳐 주신다며, 이제껏 모르던 신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흥분한 어투였다. 아버지는 몇 년에 걸쳐 댄스강사 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편지에 이렇게 쓰셨다. ‘마침내 마지막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 1급 댄스 교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받았다. 미국 출신 흑인 춤 선생에게 비싼 수험료를 내고 받은 개인 교습이 유효했다’.

댄스교사 자격시험을 치르는 아버지-오사카 1983년

서양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은 초등학교 취미 시간에 댄스를 배운다. 일찍 볼룸댄스를 배운 고교생은 프로 못지않은 수준의 실력을 갖추기도 한다. 부모들도 각종 대회에서 자녀들의 실력을 응원해주는 분위기라 ‘볼룸댄스’에 대해선 우리하고는 다른 인식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볼룸댄스가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말 고종황제 때다.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가 처음 볼룸댄스를 선보였다. 최초로 댄스를 춘 한국 사람은 1890년경의 구한말 외부대신 이하영이었다. 그는 미국공사 재임 시 다소 느린 사분의 삼박자의 ‘Boston Waltz’를 추어서 한국 최초의 볼룸댄서라는 기록을 남겼다.

https://youtu.be/PTJp1au4Ck4?si=SakMNlKc6v_8kaSi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볼룸댄스 역사는 육이오 전쟁이 끝나면서 불륜의 역사로 점철된다. 슬로우 슬로우 퀵 Trot는 ‘트로트’, 사분의 사박자의 빠른 Jitterbug은 ‘지르박’이라고 일본식으로 발음했다. 이런 댄스 스텝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곧바로 ‘제비’를 연상하게 되었다. 애꿎은 제비로선 기가 찰 노릇이지만 아마도 남자 파트너가 입었던 연미복 때문이 아니었을까? 1954년 소설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자유부인’은 사교댄스로 빚어지는 전후 한국사회 여성들의 새로운 욕망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한창 유행하고 있던 댄스를 미끼로 1년 동안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이 터졌다. 그 상대는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대학 재학 중인 여성들이었다. ‘자기 스스로 보호하지 않는 순결은 법이 보호할 필요가 없다"라는 이 사건의 판결문이 유명세를 탔고, '자유부인'이나 '사모님' 같은 말이 시중에 유행하였다.


1급 댄스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며 기뻐했던 자부심은 나중에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는 일이 되었다. 1988년 올림픽을 치러냈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 ‘제비’들이 어두운 빌딩 지하 나이트클럽의 칙칙한 조명 아래에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지는 댄스에 대한 편견과 ‘제비’에 대한 금지된 일탈도 여전했다. 지금이라면 또 모르겠다. 고향에 돌아와 댄스를 가르치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은 타국에서 꾸었던 ‘꿈’, 헛꿈이었을 뿐이다.



(PS) 장르는 다른 춤이지만 아들도 ‘춤꾼’이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 얼마 없어서 우리에게 상담했다. “나 학교 춤 동아리 들어가려는데 괜찮지?” 당시는 들어가기도 까다롭지만, 말 많고 경쟁도 치열한 특목고였다. “좀 생각해보마”하고 아내와 둘이 의논했지만 별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그래 좋다. 그 대신에 다른 애들보다 두 배를 열심히 해야 한다. 공부도 하고 춤도 추고 하려면...”.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 연극공연이 있어서 아내가 참석하고 왔다. 막간에 아들 녀석이 무대에 나와 혼자 독무대로 춤을 추는데 아내가 깜짝 놀랐다며 나에게 말했다. “근사해, 근사해 그 녀석!” 아들은 대학교 들어가서도 댄스동아리를 계속하며 신촌 적진의 길바닥을 쓸고 다녔다.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될 정도로 열심이었다. 아들도 어쩔 수 없었던 '댄스의 유혹'은 할아버지가 가졌던 ‘춤’ 유전자의 위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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