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닦아내는 아픔

유홍준 著「안목(眼目)」(옥중서체의 역사적 음미) 中 p253

by 김양훈


'유배체’의 서가(書家)와 신영복 선생

내가 신영복 선생의 예술에서 서예가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만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선생의 글씨가 일종의 옥중서체(獄中書體)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서예의 대가 중에서 원교 이광사¹⁾,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모두 귀양살이에서 그 위대한 서체를 완성했다는 사실과 맞물려 생각하고 싶은 그 무엇이다.

원교는 신지도에서 25년간,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추사는 제주도와 북청에서 10여 년 동안 유배를 살면서 그 사상과 글씨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유배체’의 서가(書家)였다, 신영복 선생의 20년 감옥살이가 이와 무관할 리 있겠는가.


한 시대의 지성으로 살다가 귀양살이나 감옥살이로 생의 창조적 열정을 잠재워야만 했던 인생들이 그 아픔의 세월 속에서 자기를 절제하고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단련시키는 과정이란, 마치 대합조개가 진주를 닦아내는 그런 아픔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처럼 외롭고 열악한 삶의 조건, 예술적 환경에서 자기를 지켜왔다는 사실을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나 침묵으로 동의하리라.


유홍준 著 「안목(眼目)」 (옥중서체의 역사적 음미) 中 p253


[옮긴이 註]

4원교 이광사.jpg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년~1777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양명학자 겸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의 시조이기도 하다.


본관은 전주이고, 조선 시대의 제2대 임금 정종(이경)의 서얼 왕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후손으로, 호조판서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의 현손(玄孫)이고,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의 넷째 아들이다. 조선 시대의 양명학자(강화학파)로 육진팔광(六眞八匡)중의 한 사람이며 서예가로서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였다. 바로 이 서체는 중국 서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선화(朝鮮化)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린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 장남은 실학자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이다.


이광사가 당시 17세이던 경종 1년(1721), 부친인 예조판서 이진검은 노론 사대신을 탄핵하다가 경남 밀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영조 31년(1755) 전라도 나주 괘서사건으로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처벌을 당할 때 당시 51세인 이광사는 이에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 사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賜死)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부인 문화 류(柳)씨가 자살하였다. 이후 부령에서 유배지의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 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移配)되었는데 그의 나이 58세였다. 이광사는 그곳에서 향년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이광사가 죽은 이듬해 2월 아들 형제가 선조들이 묻혀있는 경기도 장단 송남(長湍 松南) 거창지에 어머니 류씨와 동분 합장하였으며, 현재 그의 묘역이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DMZ)의 수풀 속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작품

일찍 전(前) 공조판서 백하 윤순(白下 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 풀과 벌레를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元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하여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문인 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代表作)으로는 <행서 4언시>(行書四言詩, 서울대 박물관 소장),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흠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한편 저술을 통해 후진을 위한 귀중한 자료(資料)들을 남겼는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 <원교집선>(圓嶠集選) <동국악부>(東國樂府)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作品)으로는 '영의정 리경석(李景奭) 표(表)',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지(誌)', '병조판서 윤지인(尹趾仁) 비', '김이원(金履元) 신도비', '형조판서 이신의(李愼儀) 표(表)' 등이 있다.


저술

∙두남집(斗南集), 필사본:규장각(古3428-347) 소장

∙<망처문화유씨기실(亡妻文化柳氏紀實)> 소개...<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 1: 고전 캐릭터 그 수천수만의 얼굴>(chapter.15. Archived 2013년 11월 4일 - 웨이백 머신)(글 김동준(동덕여대 국문학))

∙원교집선(圓嶠集選), 필사본: 규장각(奎15551)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열람),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卷一) 단군 이래의 역사를 읊은 동국악부(東國樂府) 30수

(卷二) 함경북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을 때의 작품(두남집(斗南集)과 동일한 내용. 시(詩)

(卷三)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에 이배된 이후의 작품들. <기속(記俗)>은 유배지(신지도)의 풍속을 그린 것.

(卷六) 제문(祭文)

(卷八) 오음정서(五音正序)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서, 사람의 성음이 후(喉)·설(舌)·치(齒)·순(脣)·아(牙) 등 다섯 곳에서 나오는 까닭에 오음이라 하며, 오행과도 자연적으로 합치된다고 설명한 오음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해설.

(卷十) 원교서결(圓嶠書訣)

이광사는 <서결>에서 "예를 들어 사람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랑, 기쁨, 노여움, 상쾌함, 답답함, 속임, 뉘우침 따위 감정이 순간에도 변하는 것이므로, 이게 바로 조화이고 자연이니 문장도 이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마치 자연의 조화가 사물에 따라 형태를 이루되 처음부터 일정한 체제가 없음과 같다." 이것이 그의 예술론인 것이다.| (문화재청, 글 장진영, 2013. 1. 22., 묵향에 취하다, 빛과 그림자의 일생-이광사 행서 화기(李匡師 行書 畵記)-)


서화

∙이광사 행서 화기(李匡師 行書 畵記),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 소장, 보물 제 1677-1호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李匡師 筆蹟 圓嶠法帖),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 소장, 보물 제 1677-2호

∙행서사언시(行書四言詩), 서울대 박물관 소장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 간송미술관 소장

∙잉어도(鯉魚圖), 간송미술관 소장

원교 선생이 잉어를 그렸는데, 머리와 눈만 그리고 마치지 못하였다. 20년 후에 아들 영익이 동천 종형의 별장에서 이어 그렸으니 그때가 계사년 9월이다. (계사년: 영조 49년(1773) 이광사 69세, 이영익 36세).

∙산수도(山水圖),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전남 해남군 대흥사(大興寺) 현판 "침계루(枕溪樓)", "대웅보전(大雄寶殿)"

∙전남 강진군 백련사(白蓮寺) 현판 "만경루(萬景樓)"

∙전남 구례군 천은사(泉隱寺) 현판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매거진의 이전글박규수의 안목(眼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