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옛 호남신문이 1948년 7월에 기획 보도한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 1회부터 7회까지의 기사가 여순항쟁의 명예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주철희 박사에 의해 발굴되어 화제가 되었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의 총살형 기사-호남신문 1948년 9월 25일 자(2면)
그에 뒤이어 1948년 9월 25일 자 2면에 보도된 문상길 중위의 사형집행 기사가 소개되었다. ‘제주사건 문 중위 등 23일 드디어 총살형을 집행’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였다. 기사 내용은 ‘제주도 폭동 진압 총지휘관인 경비대 육군 대령 박경진을 살해한 육군 중위 문상길 등 4명을 23일 총살했다’라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1호 사형집행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문상길 중위는 육사 3기로, 제주4·3이 발발한 1948년 당시 모슬포 제9연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 주둔 제11연대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대령은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주장하며 ‘초토화작전’을 밀어붙였던 학살 주동자였다. 한편 박진경 대령은 미 군정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에 문상길 중위는 도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해 손선호 하사와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8명의 부하들과 함께 1948년 6월 18일 새벽 숙소를 급습해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다.
다음은 서울신문의 1948년 9월 25일 자 사형장면을 묘사한 기사다. “22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은 절규도 아니며 호소도 아니다. 단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것일 뿐이다.
뒤이어 손 하사관이 형장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목례를 하였다. 집행장이 낭독하자 유언으로 “여러분, 훌륭한 한국 국민의 군대가 되어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는 순간, “겨누어 총!”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이때 손 하사관의 입에서 “오오, 삼천만 민족이여!”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쏴!”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비록 군인으로서 상관을 암살한 죄인이긴 하지만, 문상길 중위는 그보다 더 큰 대의(大義)를 위해 살신성인한 義人이었다. 제주4·3 당시 무고한 제주도민의 대량학살을 막아내려 몸을 던진 문상길 중위를 역사의 법정에서 새로이 조명하고, 그의 명예회복을 논할 때가 되었다.
(蛇足-그런데 제주도 충혼묘지 입구에는 박진경 대령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50년대에 세워졌다가 마모(磨耗)로 인해 1985년 새로운 비가 세워졌다.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일동’ 명의로 세워진 추모비에는 ‘제주도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라고 적혀 있다. 제주4·3평화공원의 白碑에 아직도 정명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추모비는 마땅히 철거되고 제주의 대지에서 사라져야 한다.)
제주도 모슬포 주둔 제9연대의 장교들-아랫줄 오른편 끝이 문상길 중위이며, 맨 왼쪽이 이세호 대위, 두사람 건너 연대장 김익렬 대령, 그 다음은 심흥선 대위.
문상길 중위의 재판에 참고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던 박진경 연대장의 전임자인 김익렬 장군의 증언이 <유고 자서전>에 자세히 언급돼 있어 아래에 덧붙인다. (2018. 12. 12)
김익렬 대령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맨 오른쪽)
22.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서울에 도착, 총사령부로 들어간 나는 송호성 사령관에게 그 후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는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하면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걱정하였다. 한편 서울의 경비대 장교들은 나의 행동을 전해 듣고 한결같이 칭찬하고 지지하여 주었다. 나의 행동은 나 개인의 행동이기보다는 당시 군인들의 정신을 보여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조병옥 씨 일파의 나에 대한 집요한 중상모략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이 나를 절대 지지했기 때문에 전 경비대 군인들이 경찰과 조병옥 씨에 대한 적개심을 터뜨리는 도화선이 될까 봐 미 군정도 감히 나를 박해할 수 없었다. 나는 3~4일간 서울에서 휴식을 취한 뒤 여수 소재 제14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내려갔다. 그것은 나 개인적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그러나 인생유전(人生流轉)의 무상(無常)이 여수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 14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1개월이 못 되어 나의 후임 제주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그동안 대령으로 진급)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무부장 조병옥 씨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진경 대령의 암살지령자는 김익렬이라고 무고하였다. 나는 박 대령 암살 주범으로 의심을 받고 서울로 소환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무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나는 4개월 후에 발생한 여수 14연대의 여순반란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게 된다. 나의 후임 14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중령은 반란발생을 미연에 방지 못하였다는 죄명을 쓰고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사망하였다.
내가 제주도를 떠난 후 박진경 연대장은 ‘소신껏’ 폭도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토벌방법은 과거 일본군이 만주·중국 등지의 점령지에서 유격대를 토벌했던 것처럼 양민과 폭도를 구분치 않고 폭도 출현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은 무차별 토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의 결과는 여의치 않았다. 경비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는 반면에 폭도 측에 가담하는 도민들이 날로 늘어서 폭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해 갔다.
약 1개월이 경과된 후 군정장관 딘 장군은 박진경 연대장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하여 몸소 제주도에 내려가 연대장을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진급 당일 제주도 관·민 유지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진급 축하연을 열었다. 박진경 대령은 만취하여 밤늦게 연대본부의 자기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만취하여 취침 중인 그를 연대장 숙소 근무병(당번병)이 M-1소총으로 사살하고 자수하였다. 박 대령은 말 한마디 못하고 즉사하고 아까운 청춘을 이렇게 끝내고 만 것이다.
범인들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수십 명의 피의자를 색출, 주동자 일당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문상길(文相吉) 중위를 주범으로 하는 하사관 1명과 이등병 1명 등 모두 3명이었다. 연대장을 직접 사살한 자는 이등병이었다. 문상길 중위는 경북 출신이었고 나머지 2명은 경남 출신이었다. 제주도 출신은 없었다. 특이한 것은 문 중위 등 3명이 모두 기독교 신자로 문 중위는 특히 신앙심이 강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자기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던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하자 딘 장군은 대로했다. 그 뿌리를 뽑기 위하여 미군 CIC를 총동원, 철저한 수사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9연대 전 장병을 심문하고 또 비밀 무기명으로 여론조사도 실시하였다.
고 김익렬 중장
23. 미 CIC의 소환조사
그 여론조사는 ①현재 경비대 군인 중에서 존경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②그 이유를 물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군인들은 존경하는 군인으로 김익렬 전 연대장, 증오하는 군인으로는 박진경 대령을 꼽았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김익렬 전 연대장은 항상 군인은 국가방위가 주목적이고 애국애족만이 충성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제주도 폭도토벌 작전 때도 군기(軍紀)지시에서 ①무기를 가지지 않은 비전투원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살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②민간에서 한 톨의 곡식이라도 약탈해서는 안 되며 야채 등은 필요할 경우 현지에서 조달하되 타당한 대금을 지불하든지 물물교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행위는 약탈로 간주한다. 식수도 주인의 허가없이 사용할 수 없다(나는 각 개인에게 충분한 보급과 식량과 금액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부대가 통과한 지역은 반드시 조사반을 뒤딸려 보내 피해 유무를 조사하고 본의 아닌 피해가 있을 경우 반드시 보상을 하였다) ③무기와 탄약을 절대로 분실하여서는 안된다. 만일 이상 3개 조항을 위반하면 군법회의에서 엄단한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폭도에 시달리는 도민을 구출하라고 당부하였다. 반면 박진경 연대장은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사람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며 폭도들이다. 명령에 불복하면 무조건 사살하라. 그리고 보급은 일체 현지에서 조달(약탈)하라며 무기 탄약만 지급하였다. 박진경 연대장은 민족반역자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내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나는 박진경 대령이 피살된 이틀 후에 서울로 소환되어 미 CIC 특별정보반에서 박 대령 암살 최고지령자라는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지금의 명동 천주교 성당과 성모병원 길 건너 을지로 방면으로 내려가는 골목길이 있다. 그 골목길로 50m가량 내려가면 오른쪽에 1백여 평 되는 큰 일본식 가옥이 있다(한때는 요정으로 쓰이기도 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을 미 군정의 CIC특별반이 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여 보니 미 MP와 한국 MP 1개 중대가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나는 그 삼엄한 경계를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단순히 연대장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랬는지 또는 장병의 지지를 받는 위험인물이라서 그랬는지…….
거기에서 나는 약 1개월 편안하게(?) 지냈다. 주로 독서를 하면서 무료를 달랬다.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다. 사실 나는 당시 누가 어디서 무슨 사유로 암살당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통신이 불편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간 나는 경찰과 조병옥 씨 일파에 의해 갖은 중상모략을 당한 모양인데 그 사실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 건물 내 침실·휴게실·독서실·욕실이 달린 호화로운 실내에서 고급 음식을 먹으면서 약 한 달간을 아무 탈 없이 보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맛보는 유한(有閑) 생활이었다.
물론 몸처럼 마음도 편안한 나날은 아니었다. 그간 나를 죄인으로 몰아서 딘 장군과 조병옥 씨에게 공을 세우려는 군인·경찰·민간인 등 친일파였던 여러 종류의 민족 반역자들이 나에게 접근하여왔다. 때로는 신경전과 위협으로, 때로는 유치한 감언이설로 나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그중에는 불쌍한 느낌이 들 정도의 소인 잡배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연대장의 권위와 예의를 지켜주지 않는 자에게는 일절 대화나 면회를 거절하였다. 그런 자들도 마음의 일각에는 민족적 양심은 있었는지 대부분은 대단히 겸손하게 나를 대하였다.
약 1개월간 하는 일 없이 독서와 산보(시내 산보에는 감시자가 동행했다)로 지내는 동안 사건은 아무 결론 없이 흐지부지되고 나는 8월 초 온양(溫陽) 제13연대장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내가 온양에서 편성 훈련한 13연대는 6·25가 발발하자 임진강·문산 등지에서 전차를 앞세운 적의 대부대와 맨손으로 맞서 싸워 국군전사(戰史)의 첫 장을 장식하게 된다. 제13연대의 용기는 지금도 전훈(戰訓)으로 기록되어 기억되고 있다.
24. 암살범의 군법회의
1948년 7월 말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주범 문상길 중위와 하수인 2명의 군법회의가 개최되었다. 장소는 지금은 남산도서관이 된 경비대 군기감 본부였다. 일본 강점기 때는 일본 신사(神社) 자리였다. 재판장은 이응준(李應俊) 대령, 법무사는 김완룡(金完龍) 소령이었다(이응준 대령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이며 김완룡 소령은 육군법무감을 역임하고 소장 예편함). 나는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하였다. 이 군법회의는 군인들과 그 관계자들만 참관·방청할 수 있는 군법회의였으나 사건이 워낙 컸고 정치적인 성격도 띠어 연일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재판은 예상하였던 것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검찰관의 심문에 범인들은 3인 모두 죄상 전부를 순순하게 인정하였으므로 재판은 1시간도 못 되어 끝났다. 그들은 범행동기에 관하여 자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 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끝끝내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사고를 저질러서 본의 아니게 김익렬 연대장에게 피해를 주어 죄송하다”라고 사과하였다. 재판장 이응준 대령은 범인들에게 최후로 법정에서 진술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범인들은 사전에 심적으로 서로 상의하여 두었던지 문상길 중위가 3인을 대표하여 “진술할 말은 별로 없으나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익렬 연대장에게 최후의 부탁이 하나 있으니 들어 주겠느냐”고 하였다. 재판장은 “들어줄 만한 말이면 들어줄 터이니 말하여 보라”고 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박진경 연대장님을 사살하였으나 본인 개인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하게 여긴다”(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전에는 줄곧 ‘민족 반역자’라 하였다)고 말하고, “이 법정은 미 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 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우리 3인에게 총살형의 선고를 내리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법정의 성격상 당연히 총살형이 선고될 것이며 우리는 그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 연대장도 장차 노령하여지면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주기를 부탁한다”
일순간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단상과 단하의 방청객 할 것 없이 전부가 안색이 굳어졌다. 이응준 대령은 창백한 안색을 짓고 한참 말없이 앉았더니 법정 휴회를 선언했다. 재판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물론 전원 총살형이었다. 총살형은 수 주일 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나는 임석하지 못하였으나 참관하였던 군인들의 말은 총살형 집행 당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3인의 태도는 참으로 군인다웠다고 한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가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되게 하소서”하고 기도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 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총살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인 신문기자 중에는 그 장면을 승화시켜 감상적인 기사를 써서 경찰의 주목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