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4 3문학회

작별하지 않는다

7년 동안 떠나지 못했던, 섬

by 김양훈

이번엔 그가 차마 외면할 수 없던, 군인과 경찰 그리고 국가가 길러낸 폭력조직인 서북청년단 등이 저지른 또 하나의 거대한 학살극이 그를 덮쳐왔다. 혼란스럽던 해방정국의 제주에선 광주에서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더 오랫동안, 더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작별하지 않는다> '1.결정' 중


그는 다시 더 먼 변방으로 향했고, 한참을 매달린 끝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썼다. 그는 이 책 '작가의 말'에 "2014년 6월에 이 책의 첫 두 페이지를 썼다"고 했는데, <소년이 온다>가 세상에 나온 바로 다음 달이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이어서 쓸 수 있었고, 다시 삼 년이 지난 2021년 비로소 이야기를 매듭지을 수 있었으니, 아마도 그는 첫 두 페이지를 쓴 그날로부터 7년간 한순간도 변방을 온전히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바다 건너 제주의 어느 동굴 속에선가, 또 어느 땅속에선가 그대로 멈춰 있을 그날의 시간도 다시금 흐르게 될까. 꼭 그렇게 되길 빈다.


우리 안의 변방을 넘어설 기회로 삼아야


이번에 알게 된 일이지만, 123년이란 긴 세월 동안 노벨문학상이 단 한 번도 아시아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은 건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다. 영어라는 언어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다른 언어로 쓰인 문학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건 번역의 문제이기에 앞서 태도의 문제이고, 인종과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라는 위상에 전혀 걸맞지 않은 태도다.


중심과 변방을 갈라 보는 태도는 우리 안에도 있다. 노벨문학상이 오랜 세월 유럽과 북미 그리고 남성을 중심으로 돌면서 그 바깥에 변방이란 낙인을 찍었듯 우리도 우리가 중심이라 믿는 곳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서울, 남성, 자본, 권력, 트렌드... 따위가 지금 우리의 중심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하여 정치와 행정, 경제와 언론 그리고 문화 등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또 움직이는 거의 모든 권력이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들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구도 예상 못 했지만, 광주의 이야기라서, 저 멀리 제주의 이야기라서, 힘없는 이들이 겪은 일들이고, 벌써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우리 스스로 변방으로 밀어냈던 그 이야기들이 한참을 돌아 '노벨문학상'이라는 빛나는 이름에 싸여 우리 앞에 돌아왔다. 우리가 애써 지워왔던 그 변방에도, 아니 어쩌면 그 변방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깃거리와 또 다른 무언가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일깨워준 셈이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광주와 제주를 찾아온 외국인들이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거냐'고 물어올 때, 우린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 또 더 많은 한국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며 또 다른 변방을 찾았을 때, 우린 그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남아있을까.


-윤찬영기자 <오마이뉴스> 2024. 10. 16 자 기사 발췌.

4·3문학회는, 문학을 통해 제주4·3의 진실을 찾아가는 서울 지역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2017년 4월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 회원들이 주축이 된 『화산도』 읽기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2021년부터는 4·3관련 자료와 작품 전반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확장하고. 이름을 ‘4·3문학회’로 바꿨다. 월 1회 정기모임을 8년째 이어 가고 있다. 현재 회원은 30여 명이고 회장은 양경인, 좌장은 김정주가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