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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23. 2024

해부극장 2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  

   

수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있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마룻장처럼 삐걱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으스러졌던 손목이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     


       *     


그러나 늦은 봄 어느 오후

검푸른 뤼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살갖이 없으니

물론 여위었고

역삼각형의 골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엉치뼈 위의 디스크 하나가

초승달처럼 곱게, 조금 닳아 있다 

   

썩지 않을,

영원히 멈춰 있는

섬세한 잔뼈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


       *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작가] 혀 없는 말

함돈균(문학평론가) 

2024.10.31  <문화잡지 쿨투라>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07)

소설가와 시인은 무엇이 다른가

소설가와 시인이 쓰는 언어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요. 또는 소설을 쓰지만 시도 쓰는 소설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러나 후자의 질문의 경우, 질문은 바꾸어 물어야 합니다. 이렇게 양쪽 모두 창작하는 유형의 작가의 경우, 소설도 쓰고 시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는 시적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며, 그에게 소설은 시적인 실천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작업의 양에서 소설이 주업이 될 정도로 소설을 많이 쓴다고 해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소설은 진술의 방식인 데에 반해, 시는, ‘시적인 것’은 그의 세계관이며, 그가 세상을 사는 삶의 방식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는 세상을 관찰하며 그의 관찰을 작업노트에 기록하고 그것을 ‘옮겨’ 적지만, 시인은 ‘시적인 것’ 자체를 살 때만이, 시적인 것을 내 몸에 임재시키는 순간에만 좋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소설가처럼 ‘옮겨 적는’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의 몸 자체가 시적인 것이 임재하는 노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적인 것을 향해 자기 몸을 은총처럼 개방합니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과 그가 쓴 시와 그의 세계관과 그의 몸과 삶은 분리되기 어렵습니다.     


소설이 문학적 가상을 구현하는 작가의 개별적 연극 무대라면, 시는 작가의 삶을 내밀하게 길어올리는 깊은 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과 시의 화자는 그래서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발화 양상을 가집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그때그때 상연되는 가상의 캐릭터, 다른 페르소나로서 그 연극-작품이 끝나면 벗을 수 있는 역할가면이라고 한다면, 시의 화자는 시집이 끝나도 다음 시집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목소리를 보유합니다. 그것은 누적되고 “스며오르는 것/번져오르는 것”(「마크 로스코와 나 2」)입니다. 작가 자체가 화자이며, 그의 삶 자체가 시집의 페르소나를 이룹니다. 윤동주 시의 화자와 윤동주라는 시인을 따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김수영 시의 화자와 시인 김수영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시인-소설가는 소설도 시적으로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을 막론하고 시와 소설을 함께 쓴 작가들의 예를 들어볼까요. 시도 쓰고 소설도 쓴 작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소설을 쓸 때조차 시적인 문장을 소설 속에서 관철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소설만을 쓰는 작가들이 소설적 가상 무대 위에서 캐릭터를 작품 안에 상연하고 한정하려는 데에 비해, ‘시인-소설가’는 시적인 문장을 페르소나를 벗지 않고 여러 소설들의 창작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구현하려고 분투합니다. 이상의 소설은 이상의 아이러니한 시적 세계관의 구현이었고, 지금 활발하게 소설과 시를 함께 쓰는 이장욱의 소설들 역시 시적 아이러니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불가해함과 우연성에 관한 또 다른 문학적 구현입니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보르헤스의 소설들은 보르헤스가 지닌 시적 형이상학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입니다.     


한강은 여러 권의 소설집에 비해 단 한 권의 시집만을 출판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작업을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이를 수상의 선정 이유로 제시했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의 연약함’은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고, ‘시적 산문’이라는 것은 그 문학의 양태와 작가적 스타일을 드러냅니다. 한 작가의 문학을 그의 것으로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양태와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이 선정 이유에서 굳이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소설과 시를 모두 쓰는 작가에게 소설 부분에 상을 주었지만, 그 핵심을 이루는 바탕에는 ‘시적인’ 스타일이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적 산문’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 소설에 바탕을 이루는, 정확히 말해서 그의 소설적 글쓰기를 추동시키는 시적 에너지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것은 그의 유일한 시집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학적 모티프이자 고갱이일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평문에서 그것을 꼭 집어서 ‘혀가 없는 말’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말은 세계를 왜곡한다

나에게/혀와 입술이 있다//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견딜 수가 없다, 내가//안녕,이라고 말하고/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라고 대답할 때//구불구불 휘어진 혀가/내 입천장에/매끄러운 이의 뒷면에/닿을 때/닿았다 떨어질 때…(중략)…//혀가 없는 그 말이어서/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 「해부극장 2」 부분     


사람에게 혀와 입술은 말을 하기 위한 필수 기관-도구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혀와 입술을 사용합니다. 혀와 입술은 ‘안녕’과 ‘어떻게 생각하세요’와 ‘정말이에요’로 대표되는 일상 담화의 세계를 위한 창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에 여러분은 얼마나 진심인가요. 타인에게 ‘안녕’을 묻는 당신은 진정 타인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있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당신은 진정으로 타인의 의견이 궁금한가요. 당신은 그 타인의 말을 자기 안에 수용할 준비를 하고 그런 말을 발화하나요. ‘정말이에요’라는 당신의 대답은 당신의 절박함을 전달하기에 충분한가요. 혀와 입술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없지만, 혀와 입술로 진술되는 말들의 세계는 자주 영혼 없는 안부 인사와 상투적 반복성, 턱없이 부족한 표현방식으로 인해 허식과 기만과 소통의 좌절을 겪곤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들로 구축된 문화의 세계이며, 생활세계이고, 문명의 일상을 이룹니다. 인간이 이루어 사는 세계는 그렇게 무언가 부족하고 어긋나며 왜곡된 말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이 없으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으며, 의미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보르헤스가 쓴 「알렙」이라는 소설은 이 세계를 모든 각도에서 한 번에 볼 수 있는 완전한 우주 구슬, 신의 구슬인데, ‘알렙(aleph)’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인들이 쓰는 알파벳 첫 글자 ‘알렙( א)’을 뜻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알렙’을 모든 글자의 시작과 기원이라는 보기 때문에, 그것을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성서 요한복음의 문장은 모든 것의 시작에 ‘말(언어)’을 두는 그들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작가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서 말로 지어진 의미의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말로 세계의 진상을 다 드러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리(道)’를 진리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동아시아의 노자나, 진리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사상가이기 전에 언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베르 까뮈는 『이방인』에서 이를 ‘부조리(absurd)’라고 통찰했습니다.     

혀가 없는 말

그런데 대체로 자기 언어를 통해 이런 말들의 세계에 접근하고, 세계를 탐구하는 작가는 소설가와 시인이 다른 ‘창작 전략을 채택합니다. 소설가가 일상어보다 더 많은 양의 말들을 쏟아내고 구체적이고 촘촘하게 배치함으로써 말들의 세계가 지닌 부조리함을 폭로하려는 데에 비해, 시인은 가능한 덜 말하려고 합니다. 그 자체로 부조리한 말을 제아무리 쏟아내서 정교하게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한들, 부조리의 세계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소설가의 묘사가 최대한의 촘촘한 논리적 묘사를 통해 논리성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데에 비해, 시인은 최소한의 말을 통해 논리적 세계 바깥으로 ‘훅’ 나가버리려고 합니다. 소설가가 최대한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데에 비해, 시인은 최소한의 언어로 질문하려고 합니다. 그 질문은 논리-상식-이해관계-이데올로기로 구축된 세계에 더 촘촘한 논리로 맞서려 하기보다는, 논리적 말을 가장 덜 사용하는 질문의 방식을 통해 말의 세계를 법정에 기소하는 회의주의자의 언어입니다.     


「해부극장 2」의 저 말이 무언가를 묻는 ‘질문형’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시인의 언어는 혀와 입이 있어도, 일상인의 혀와 입을 사용하지 않는 말, ‘혀가 없는 말’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단단한 밀봉을 배운다”(「저녁의 소묘 3-유리창」), “나는 입술을 다문다”(「새벽에 들은 노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시적 문장이 패러독스와 아이러니를 즐겨 쓰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시인은 논리를 공격하는 ‘반논리’의 언어조차 논리성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차라리 논리의 틈바구니로 스며들어가는 ‘비논리’의 언어를 구사가고 탐구합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사물의 철학』 등이 있음.     

* 《쿨투라》 2024년 11월호(통권 12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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