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 그리고 세력화
1부 전쟁
제2장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 그리고 세력화 (윤정란 著)
2. 한국전쟁과 기독교계의 분열
광복 직후 장로교의 첫 주도권 경쟁은 출옥성도 그룹과 조선신학원 그룹에 의해 시작되었다. 1946년 많은 출옥성도가 월남해 경상남도 지역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과 합세하면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출옥성도를 대표하는 평양 산정교회의 목사 한상동은 월남한 후 봉천신학교 출신의 박윤선, 주남선 등과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신학교는 이른바 ‘정통 신학’을 고수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정통 신학’을 고수하거나 신사 참배 반대를 했던 이물 외에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고신파의 대표자인 엄주신이 1954년 37회 총회에서 한 고별사를 계기로 이 그룹은 기존의 장로교로부터 완전히 분립했다. 이후 이들은 1956년 경남, 부산, 진주, 경상, 전라, 경기 등 6개 노회(老會)로 총회를 구성했다.⁴
1954년 조선신학원 그룹도 기존의 장로교 그룹에서 밀려난 뒤 대한기독교장로회를 만들었다. 이 그룹은 1930년대부터 새로운 신학의 바람을 일으킨 인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로교는 신진 신학자들로부터 큰 도전을 받는다. 즉, 성서무오설(聖書無說)¹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여권(女權) 문제,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 아빙돈 성경 주석 사건 등이다. 이러한 일련의 문제 제기는 1954년에 장로교가 분열하는 데 명분이 되었다.
여권 문제와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은 함경남도 노회 산하 성진중앙교회의 목사 김춘배와 남대문교회에서 시무하던 목사 김영주가 연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 간사이(關西) 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신진 신학자들이었다. 당시 이 신학부에는 카를 바르트(Kahl Barth)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사회복음주의 분위기가 강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학을 공부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한국 장로교가 신봉하고 있던 성서무오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권 문제는 기독교 여성들이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들은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장로교의 여성 차별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함경남도 노회에 소속된 22개 교회의 여성들이 여성 장로직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장로교는 여성의 치리권(治理權)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춘배가 이에 대해 지지하는 글을 《기독신보》에 실은 것이다. 그는 여성의 치리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교회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서』에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2000년 전 일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근거로 여성들의 치리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총회에서는 연구 위원을 신설해 이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위원들은 김춘배의 주장에 문제가 있으며 목회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김춘배는 한 발 물러나 자신의 주장을 취소한다는 내용서를 제출했다. 이 문제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었다.⁵
이와 동시에 김영주가 연루된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이 총회를 다시 동요시켰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펴낸 『만국주일공과(장년부)』의 내용 중에 「창세기」가 히브리인의 오래된 신화를 근본으로 삼았다는 것과 「창세기」의 저자가 확실치 않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김영주와 관련이 있었으나, 그가 필자로 명기되어 있지는 않았다. 총회에서는 여권 문제를 특별 연구 위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심사를 의뢰했다. 연구 위원들은 심사 후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히 조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영주와의 직접적 관련성을 찾지 못해 정치적 처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⁶
아빙돈 성경 주석 사건은 1934년에 출판된 「단권 성경주석」의 내용을 둘러싸고 장로교 내부에서 문제가 일어난 사건이다. 이 책은 미국 아빙돈(애빙던) 출판사(Abingdon Press)에서 발행한 『성서』 주해서를 번역해 1934년에 신생사에서 출판했다. 번역과 편집은 감리교의 유형기가 책임지고, 감리교의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 장로교의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관식, 김재준, 조희렴, 윤이구 등을 비롯한 53명이 번역에 참여했다. 감리교에서는 이를 수용했으나, 장로교에서는 성서무오설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한경직, 김재준, 송찬근 등이 소속되어 있던 평양노회에서는 이 문제를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보고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이들을 심문했다. 이 사건은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등 셋 사람이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신학지남》에 사과 성명을 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서무오설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다만 총회의 권력에 맞설 만큼 힘이 없었기 때문에 논쟁을 유보했을 뿐이다.⁷
김재준은 1937년부터 간도 용정의 우진학교 교목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십자군》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 참배 문제로 문을 닫자 김재준, 송창근, 윤인구 등은 서울 승동교회 장로 김대현의 헌금으로 조선신학원을 설립했다.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의 설립이 인가되어 승동교회 지하실에서 개강했다.⁸ 조선신학원은 3회 졸업생까지 배출한 후 해방을 맞이했다.₉
광복이 되자 송창근, 김관식, 김영주 등은 1946년 조선신학교(1945년 이전 조선신학원)를 총회 직영으로 해달라고 청원했다.¹⁰ 이는 별다른 갈등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갔던 선교사들이 재입국하고 북한에서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월남하면서 조선신학교를 둘러싸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평양신학교는 북한에 있었기 때문에 총회 직영은 조선신학교뿐이었다. 따라서 이 학교의 직영 문제를 두고 갈등이 생긴 것이다.
조선신학교는 성서무오설을 부정하고 있었으므로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대부분의 선교사와 기독교인에게는 마땅치 않았다. 이들은 장로회신학교를 재건하는 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1948년 3월 15일 대전 제일교회에서 신학문제대책위원회를 전국적으로 구성해 장로회신학교을 잠시 보류하고 조선신학대학(1947년 이전 조선신학교)을 개혁하고자 했다. 하지만 1948년 4월 20일 제34회 총회에서 조선신학대학의 완강한 반대로 개혁안은 부결되었다. 그러자 신학문제대책위원회는 서울 창동교회에서 장로회신학교의 개교를 결정했다. 이사장에 이정로, 임시 교장으로 박형룡을 선임했다.¹¹
전국의 여러 노회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으로 할 것을 헌의(獻議)하자 1949년 4월 19일, 제35회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총회 직영으로 2개의 신학교가 존재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되자 두 학교를 합동하자는 제안이 제기되어 합동위원회가 조직되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속회된 총회에서 합동위원회는 두 직영 신학교의 인가를 취소하고 총회 직영의 새로운 신학교의 건립을 제안했다.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조선신학대학의 폐교를 결의했다. 조선신학대학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를 제기했다. 즉, 합동 결의를 각 노회에 묻지 않고 총회가 직접 결정한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순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1953년 4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8회 총회에서는 김재준의 목사직 박탈과 경기 노회에서의 제명, 조산신학대학 졸업생의 교역자 자격 불가, 조선신학대학 졸업생의 교역자 자격 불가, 조선신학대학파를 지지하는 캐나다 연합교회의 선교사 윌리엄 스콧(William Scott; 서고도)에 대한 심사 등을 결의했다. 그러자 같은 해 6월 10일에 조선신학대학 강당에서 전북, 군산, 김제, 충남, 경서, 콕포, 충북, 제주 등 분립된 9개 노회의 대표들이 모여 법통 38회 총회를 열어 37, 38회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을 모두 백지화했다. 또한, 1954년 6월 10일에 조선신학대학에서 법통 총회를 열고 교단 이름을 대한기독교장로회라고 명명했다.
이로써 광복 직후에 장로회 총회는 1954년을 기점으로 서북 출신의 월남 기독교인들, 특히 한경직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주도권을 확보하고, 고신파와 기독교장로회(조선신학대학파) 등은 경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교단을 수립했다. 서북 출신의 월남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 것은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옮긴이 註]
1)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Biblical inerrancy)은 인류 구원을 위한 복음을 담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기독교 보편교회 전통의 주요 개념이다. 초대교회부터 성경이 구원의 지침으로 완전하고 무오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미 4세기 신학적 개념으로 활용했다.
20세기에 와서 전통적인 성서무오설 이외에도 축자영감설의 성서무오설이 등장하며 원래 의미와 전혀 다르게 혼용하는 기독교 용어이다. 성서무오설 용어는 현재, 전통적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적 성서무오설을 구분하여야만 한다.
보편교회(공교회) 시절부터, 11세기 교회 대분열 이후 동방교회나 서방교회에서도 성경의 권위를 두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16세기에는 서방교회의 종교개혁 사상에서 신학적 용어로 주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개신교회에서 특히 강조하는 용어다. 전통적 성서무오설은 하나님의 복음을 담은 성경이 인류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에 '완전함'을, '흠 없음'을 강조하는 신학적 개념이다.
성서무오설의 개념은 이미 4세기 보편교회(공교회) 시절부터 내려왔고, 16세기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을 지지한 개혁 찬성파, 현재의 개신교회가 강조한 신학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성경의 교회내 권위 회복을 강조하며 16세기 서방교회 문제가 제도주의, 즉 '교황중심주의'였으므로 이를 극복하고자 제시한 기독교의 원형, 즉 '복음중심주의'를 지지하는 개념이다. 마틴 루터를 포함한 개혁 사상가들 역시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다. 성서무오설은 ‘인류 구원’의 복음이 성경에 쓰였고, 교회는 성경을 기초하므로 그 최고 권위를 인정하는 개념의 표현이다. 초기 개신교 신학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에서 출발하여 현대까지 정통 개신교 교회들이 인류 구원을 이루기에 성경의 '흠 없음'을 강조하는 성경 이해 방식이다. 같은 서방교회인 천주교회는 교황무오설을 더 지지한다.
이에 반해, 20세기 이후에 개신교 보수파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축자영감설적 성서무오설을 주장하여, 자연과학적 증명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며 그 용어 의미를 변형하였다. 원래 의미와 다르게 각인된 기독교 용어 중의 하나로, 축자영감설과 성경 문자주의와 혼용되어 본래의 의미와 전혀 다른 용례로도 사용한다.
주요 신학자의 성경 개념
종교개혁의 대표적 신학자로서 마틴 루터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2명의 신학자 장 칼뱅과 존 웨슬리의 성경에 대한 개념으로서 '전통적 성서무오설'을 살피고자 한다.
마틴 루터의 성경
마틴 루터는 성경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성서무오설의 표현을 사용한다. 중세 말 14세기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이 성경을 기반으로 서방교회의 문제를 공격한 사실을 루터는 잘 알았다. 루터는 절대적 성경의 권위를 설명하려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하였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 의미의 성서무오설의 표현이다. 루터에게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안에 있고, 성경은 그분의 가르침이며, 속죄의 희생, 죄의 용서, 구원의 사역이라는 의미이다. 루터는 성경이 인류문명을 위한 윤리, 영성을 알려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주장하였다.
장 칼뱅의 성경
장 칼뱅의 성경 주장은 절대적 권위의 성경을 설명하며, 그는 성경은 성령의 구술(성경 영감설)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포함하여 성경은 성령을 통해 쓰였다고 주장했다. 흔히 이를 칼뱅이 축자영감설을 주장한 것이라 여기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칼뱅은 사도들이 구약을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궁극적 목적으로만 기록했고, 성경 기록자의 인간적 차이를 이해했고, 칼뱅은 단순히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구절 활용의 주석 방식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성령의 영감’은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 성경보다 교황과 관련 제도를 중요시하는 교황주의자와의 논쟁에서만 성경의 권위를 설명하며 사용하였다.
칼뱅이 설명한 성령의 구술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나 개신교 보수주의에서 말하는 축자영감설이 아니다. 칼뱅이 전한 성령의 구술 표현은 신학이 성경에 의존하였고, 당시 서방교회 개혁 주장 역시 성경에 근거한다는 설명이다.
존 웨슬리의 성경
존 웨슬리의 성경에 대한 견해 역시 인간의 말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역설한다. 강력한 성경 권위를 주장하고,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였고 설명하며, 성경의 무오함을 피력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영은 성경 문헌을 기록한 사람에게 영감을 준 것만이 아니라 '진지하게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항상 영감을 준다'라는 주장을 동시에 하였다. 성경은 성령을 통해 기록한 하나님 말씀의 수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한다는 ‘역사의 증언’이라고 보았다.
웨슬리의 성경 이해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단계를 중요하게 여겼고, 문자적인 성경 이해를 경계하였다. 웨슬리는 성경, 전통, 이성, 체험의 관점에서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 말씀에 다가서라고 강조했다. 성경해석을 첫째로 성경 자체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조력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초대교회의 해석이 성경을 이해하는 도움이라고 소개했고, 셋째 인간의 사고능력은 하나님의 은사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영은 이성 사용을 통해 '성경해석'을 하도록 하며, 넷째 성경은 체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실천적으로 하나님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성경 이해를 밝혔다.
대한민국의 주요 개신교단의 성경 이해
대한민국 대표 개신교 교단의 신학을 형성하는 신학자 칼뱅과 웨슬리 역시 성경의 무오함을 강조하였다. 칼뱅은 성경을 기록이 아닌 하나님의 신탁으로 여겼으며, 웨슬리는 성경의 오류가 있다면 우주 천제에 오류가 있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 강조점은 성경의 기독교 내 가치를 강조하는 표현이며, 어떤 교회의 제도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이들 또한 구약과 신약의 시점 차이와 성경 내부의 논점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했었다. 다른 신학적 배경을 지닌 정통 개신교단 역시 이와 신학적으로 다를 바 없다.
정통 개신교 신학을 따르는 칼뱅 신학 계열의 교단들이나 웨슬리 신학 계열의 교단들은 구원을 위한 성경의 온전함, 무오함을 인정하며, 동시에 성경에 대한 다양한 연구인 문헌분석연구와 역사적 연구, 수사적 연구 등의 각종 연구와 성경신학의 통합과 각 내용의 독특성을 연구하며, 고고학적 연구까지도 병행한다. 정통 개신교 교단들은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성경이 인류 구원과 교회에 흠 없이 완전하고, 무오함을 지지한다. <위키백과 일부 발췌>
2) 치리권이란 기독교 장로교 법에서, 치리회에 부여한 권한이다. 교회의 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단체(치리회)에 있다. 치리권이 개인에게 있으면 소신대로 신속히 다스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치리권자인 개인의 실수와 과오를 범할 단점도 있다. 그러나 치리권이 단체 (치리회)에 있으면 여러 회원이 뜻을 모아 치리권을 행사하므로 잘못을 범하는 일이 적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치리권은 당회.노회. 총회에 있고 그 치리회에 장로는 회원이 되어 치리권을 행사한다.
[필자 註]
4) 전택부, 『한국교회발전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289~290쪽.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종교교육부, 1956), 149~161쪽 참조.
5)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 기독교의 역사. 2』(기독교문사, 1990), 154~156쪽.
6) 같은 책, 157~159쪽.
7) 같은 책, 159~161쪽.
8) 주재용, 「김재준의 생애」,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풍만출판사, 1986), 27쪽.
9) 김재준 지음, 장공자서전출판위원회 엮음, 『범용기: 장공 김재준 자서전』(풀빛, 1983), 179쪽.
10)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197쪽.
11) 같은 책, 228, 245쪽.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시대 한국기독교 여성운동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숭실대학교에서 한국사 강의를 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기독교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가 점차 영역을 넓히면서 조선시대부터 근대 독립 운동가들, 해방 이후 여성들의 삶까지 역사 속 여성 문제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견고한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서 500년이 지난 오늘날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는다. 그동안 펴낸 저서로는 《조선왕비 오백년사》, 《한국기독교여성운동의 역사》, 《전쟁과 기억》(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