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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도스토옙스키(VII)

1821년 11월 11일~1881년 2월 9일

by 김양훈
2025년 2월 9일은 도스토옙스키의 사망일이었습니다. 추모하는 뜻에서 작년 5월 우리 모임 FB 단체방에 올렸던 연재 글을 다시 읽습니다. R.I.P.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中 발췌⑥

사실주의와 환상(I)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은 유일한 존재의 직접적 현실이라는 전제하에, 진실을 추구한다. 그의 내면에 깃든 예술혼은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주의자, 그것도 철두철미한 사실주의자다. 그는 형식들이 모순과 대립에 신비스러울 정도로 유사해지는 그 최종 한계에까지 접근해 들어간다.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현실은 평균에 익숙한 모든 일상적 시각을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도스토옙스키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주의가 환상적인 것에 가까워지는 한, 나는 사실주의를 사랑한다. 내게 현실보다 더 환상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니, 현실보다 더 돌발적이고 상상하기 힘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예술가보다 그에게서 한층 더 강렬하게 대두되는 진리는 개연성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과 대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는 심리적으로 무방비한 평균인의 시력을 넘어서 있다. 범인의 눈은 물방울 속에서 투명한 하나의 조직만을 볼 뿐이지만, 현미경은 우글거리는 미생물의 다양한, 무수한 혼돈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란 더욱 높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눈에 드러나 있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진리를 인식하는 자이다.


사물의 표면 아래 깊숙이 존재하면서 모든 실존의 핵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더 높고 깊이 있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에겐 바로 정열 그 자체였다. 그는 하나의 통일체와 다양한 복합체로서의 인간을 자유로운 시선과 동시에 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참되게 인식하려 했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현미경의 정확한 관찰력과 천리안의 능력을 결합하는 환상적 리얼리즘이 존재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태동한 최초의 사실주의 예술가나 자연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맥락을 달리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분석에 있어 더욱 치밀할 뿐 아니라, 소위 ‘철저 자연주의자’로 불리던 예술가들의 한계를 한층 뛰어넘는다. (철저 자연주의들이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한 지점을 그는 계속 초월한다).


그의 심리학은 창조적 정신의 다른 영역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에밀 졸라 이후 ‘정밀 자연주의’는 자연과학자들에게서 직접 유래하게 되었다. 플로베르는 “유혹” 또는 “구원”에 대한 자연 색채의 효과를 찾기 위해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이천권의 책을 두뇌의 증류기 속으로 흡입한다. 졸라는 소설을 쓰기 전에 모델을 스케치하고, 사료를 수집하려고 기자처럼 수첩을 들고 증권거래소나 백화점, 아틀리에를 3개월이나 돌아다녔다. 현실은 세상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자연주의자들에겐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열려 있는 실체인 셈이다. 그들은 모든 사물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측량하는 렌즈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삶의 개별적 요소들을 수집하고 정리한 뒤, 이를 혼합 및 증류하는 과학의 신봉자들로서, 일종의 결합과 용해의 화학실험을 추진해 나갔다.


자연주의자들에게 과학이 예술이라면,
도스토옙스키에게는 마법이 예술이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예술적 관찰과정은 마법적인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자연주의자들에게 과학이 예술이라면, 그에게는 마법이 예술인 것이다. 그는 화학작용을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연금술을 시도하며, 천문학이 아니라 영혼의 점성술을 실험한다. 그는 냉정한 연구자가 아니며, 환각 상태에서 마법적 악몽과도 같은 삶의 깊이를 몽롱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런데도 그의 현실을 뛰어넘는 환상은 자연주의자들의 정돈된 관찰보다 더욱 완벽하다. 그는 자료를 수집하지 않아도 가치 기준이 제대로 서 있다. 사물의 맥박을 만져보지 않고서도 그의 천리안 같은 진단능력은 현상의 열기 속에서 비밀의 근원을 파악한다.


꿈처럼 애매한 상태에서도 뭔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그의 지적 재능인 것으로, 그의 예술에는 마법적인 어떤 것이 깃들어 있다. 한 번만 보면 단번에 세계를 파악하고, 한번 소묘하면 그림이 완성된다. 그에게는 자연주의자들처럼 스케치나 세부묘사가 필요 없다. 그는 마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라스콜리니코프, 알료사, 표도르 카라마조프, 미슈킨에 이르는 그의 생동감 있는 주인공들을 한번 떠올리면, 그들은 우리의 감정 속에 소름 끼치도록 깊숙이 들어와 있다.

Fyodor Dostoevsky Draws In His Manuscripts

도스토옙스키는 이들에 관해 어떻게 메모를 하는가? 아마 단 세 줄로 간략히 그들의 용모를 스케치하는 일종의 속기형식으로 적어놓았을 것이다. 그들의 첫인상에 관해서는 특징을 나타내는 한 마디 낱말로 표현하고, 얼굴 생김새에 관해서는 네다섯 문장이 전부다. 나이, 직업, 지위, 의복, 머리 색깔, 인상 등, 개개인을 묘사함에 있어 본질적인 모든 것은 단순히 속기로 압축되어 묘사된다. 그런데도 인물들 각자는 하나같이 우리에게 뜨거운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마법적 사실주의와 철저 자연주의 작가들의 정확한 묘사를 비교해 보자. 졸라는 작업에 앞서 먼저 등장인물들의 전체적인 명세서를 준비한다(오늘날에도 이 특이한 문서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소설의 문턱을 넘으려는 사람에겐 통행증과도 같은 공식적 인상착의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키는 몇 센티인지 정확히 재보고, 이는 몇 개 빠졌냐를 적고, 뺨에 난 사마귀 수를 세어보고, 수염을 만져보거나 피부의 부스럼도 살피고, 손톱까지 자세히 더듬어 본다. 그 사람의 혈액, 유전 관계나 부채를 추적하고, 수입은 얼마인지 알아보기 위해 은행 통장을 찾아본다. 그는 외적으로 잴 수 있는 것은 모두 측정한다. 그렇지만 이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통일적 환상은 사라지고, 정교한 모자이크는 수천 개의 조각으로 깨어진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물리적 우연성뿐이다.


여기에 자연주의 예술의 오류가 나타난다. 자연주의자들은 소설의 시초부터 정지상태의 정확한 인간, 영혼의 수면 상태에 빠진 인간을 묘사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이미지는 한낱 죽은 자의 가면을 충실하게 묘사한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가면 속에는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자연주의 작가들이 끝나는 곳에서야 비로소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자연주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흥분, 열정 속에서 고조된 상태에 이르러서야 조형적으로 변한다. 자연주의 작가들이 육체를 통해 영혼을 묘사하려 한다면, 그는 영혼을 통해 육체를 표현하려고 한다. 열정이 그의 인물들을 바짝 끌어당겨 긴장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눈동자는 감정으로 촉촉해지며, 시민적 침묵의 가면, 영혼의 경직상태가 그들에게서 떨어져 내린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의 이미지는 구체화한다. 이렇게 그의 인물들이 열정을 갖게 되어야만, 환상적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형상화하려던 작품에 다가선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처음에는 어둡고 약간 그늘진 윤곽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듯 그의 소설로 들어간다. 윤곽만이 보이고, 정확히 느낄 수 없는 불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익숙해지는데, 눈은 그만큼 예민해진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깊은 여명으로부터 섬세한 영혼의 흐름이 인물들에게서 빛나기 시작한다. 인물들은 열정에 빠지고 나서야 빛을 향해 다가선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은 열정을 달구어야만 비로소 눈에 띈다.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터져야만 비로소 소리가 울린다. “그의 작품에서는 영혼을 얻고자 육체가 형성되며, 열정을 얻고자 이미지가 형성된다.” 달구어지고 나서야 인물들이 내부에서 특이한 열병이 시작된다. 그의 인물들은 모두가 변화하는 열병의 상태를 나타내는데, 바로 이때 도스토옙스키의 사실주의가 시작된다. 말하자면 개별적인 것들을 포획하려는 마법의 사냥이 신호탄을 울리는 것이다. 그제야 그는 아주 작은 움직임도 따라가 찾아내고, 미소도 발굴하며, 착종된 감정의 구불구불한 여우굴 속을 기어 다닌다. 무의식이라는 어두운 세계까지 인물들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따라서 모든 움직임은 조형적으로 묘사되고, 모든 생각은 수정처럼 명료하게 결정화된다. 쫓기는 영혼들이 극적인 것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면 갈수록, 영혼은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본질은 더욱 명료해진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파악할 수 없는 피안의 상황들, 즉 병적이고 최면에 걸린 듯한 간질 발작의 상황들은 임상학적 진단의 정확성과 기하학적 인물의 뚜렷한 윤곽을 지니고 있다. 가장 미세한 뉘앙스조차 희미해지는 법이 없고, 가장 작은 떨림조차 그 날카로운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이 초자연적 광채에 현혹되어 단념하고 외면한 그 지점에서 그의 사실주의가 분명하게 가시화된다. 인간이 자기 가능성의 한계를 깨닫고, 지식이 거의 광기가 되어 버리고, 열정이 범죄로 변하는 바로 그 순간들이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최고의 환상적 상황인 것이다.

우리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거리나 방에서 어슬렁거리는 백수, 25세의 젊은 의학도, 또는 이런저런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로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잘못된 열정이 자아내는 극적 환상의 순간이 우리의 뇌리를 강렬하게 두드린다. 그는 손을 떨고, 이마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살인을 저질렀던 집의 계단을 살그머니 올라간다. 그는 결국 자신의 고통을 비밀스러운 황홀경 속에서 또 한 번 감각적으로 누리고자 피살자의 집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것이다. 우리는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혹독하게 심문을 받을 때, 분노에 치를 떨고 입에 거품을 문 채 광분하여 주먹으로 탁자를 박살 내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 밖에도 레오나르도가 웅장한 풍자화 안에 그로테스크한 육체와 그것의 변태를 그려 넣듯, 우리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흥분된 감정의 절정상태에서 인간을 형상화함을 언제나 보곤 한다.


다른 작가들이 초자연적 광채에 현혹되어
단념하고 외면한 그 지점에서
그의 사실주의가 분명하게 가시화된다.


<사실주의와 환상(II)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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