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도스토옙스키(VI)
1821년 11월 11일~1881년 2월 9일
2025년 2월 9일은 도스토옙스키의 사망일이었습니다. 추모하는 뜻에서 작년 5월 우리 모임 FB 단체방에 올렸던 연재 글을 다시 읽습니다. R.I.P.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中 발췌⑤
운명의 의미(III)
올림포스의 신과도 같은 괴테는 조화로운 인간이 되고자 했다. 모든 대립을 파괴하고 지나친 열정은 식히는 것, 힘들을 안정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것 등을 그는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보았다. 괴테는 자신에게서 관능을 배제하고, 예술에 대한 과도한 열정을 절제했으며, 도덕성을 위해 점차 위험의 모든 싹을 근절했다. 비속한 것에 힘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이였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는 삶의 우연성이 보여주는 이원론에 정열을 쏟았다. 그에게는 경직상태처럼 보이는 조화란 추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상반되는 것들을 신성한 조화 속으로 잡아매기보다는, 그것을 신과 악마로 확연하게 나누어, 그 사이에 우리의 세계를 설정했다. 그는 무한한 삶을 원했다. 삶은 그에게 대립의 양극단 사이에 자리한 전기 방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내부에 씨앗으로 존재하는 선과 악, 위험하면서도 도발적인 그 모든 것은 열대의 뜨거운 열기로 꽃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규범이 아니라
늘 삶의 충일을 추구했다.
그의 도덕은 고전적인 것, 규범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힘의 포화상태에 의존한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그에게 무엇보다 강렬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선과 악이 가장 강하고 도취적인 형식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는 규범이 아니라 삶의 충일(充溢)을 늘 추구했다. 반면 톨스토이는 작품을 쓰다가 불안에 사로잡혀 일어나서는 하던 작업을 멈추곤 했는데, 돌연 예술을 포기한 채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자신이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아닌지 평생 고뇌하며 살았다. 그 때문에 톨스토이의 삶은 교훈적이며, 교과서나 팸플릿 같았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삶은 예술작품, 비극, 아니 운명 자체였다. 그는 합목적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고, 자신을 성찰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신을 강하게 단련했을 따름이었다.
톨스토이는 영구히 구제받지 못할 죄악들을 통렬히 비난했고, 무엇보다도 민족 앞에서 소리 높여 힐책했다. 이런 것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침묵은 오히려 타락의 도시 소돔을 족히 내포하는 것이어서 톨스토이의 도덕적 태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판단하거나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을 강화하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의 천성이 지닌 악의 성향과 위험에 대해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위험을 추진력의 계기로 선호했으며, 다가올 후회 대신에 죄를, 굴종 대신에 거만을 숭배했다. 그러므로 그를 도덕적으로 변론한다거나, 원초적 아름다움을 단지 시민적 가치 기준에 따라 어설픈 조화를 이루어내려는 태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카라마조프란 인물을 창조해 낸 도스토옙스키는 <청춘>에 나오는 대학생, <악령>의 스타브로긴,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만들어 냈다. 이 인물들은 육욕에 대한 광신자들인 동시에, 환락에 완전히 빠진 채 외설에 통달한 대가들이었다. 이들은 삶에 있어 가장 비천한 관능의 형식들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는데, 이 형상들에게 무서운 현실성을 부여하려면, 탈선에 대한 정신적 사랑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더할 나위 없는 작가의 예민함은 이중적 의미에서의 에로티즘, 육체적 도취의 미묘한 쾌감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도스토옙스키의 에로티시즘은 수렁 속에서 헤매다가 방탕에 빠지곤, 결국 죄악과 범죄로 치닫는 가장 섬세한 정신적 몰락에 이른다. 그는 온갖 가면 아래 숨겨진 에로티시즘을 알고 있었으며, 바로 아는 자의 시선으로 성적 광기를 비웃곤 했다. 그는 동정심, 복된 연민, 세계 형제애, 쏟아지는 눈물을 가장 고귀한 정신적 사랑의 형식 속에서 깨닫게 된다. 이 모든 비밀스러운 본질은 그의 내부에 깃들어 있었으며, 다른 참된 작가들에게 나타나듯 일시적인 화학적 흔적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고 힘찬 정신의 추출물이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나타나는 탈선행위에는 매번 성적 흥분과 감각적 떨림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많은 부분 쾌락의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육욕만을 탐닉한 탕아라든가 도락자¹⁾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이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병적으로 고통을 추구하듯 쾌락에 대해서도 병적인 성향이 강했다. 어느 면에서는 충동에 매여 있는 노예 같았고, 정신이나 육체의 호기심에 좌우되는 종과 같았다. 이런 호기심 때문에 그는 무서운 체벌을 받아 험지로 몰리거나 외딴 가시덤불로 쫓기곤 했다. 그의 쾌락은 저속한 향유가 아니라 전체 감각의 생명력을 담보로 하는 도박이었다. 그것은 항상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비밀스러운 간질에 대한 불안한 기대, 위험이 다가오기 직전 찾아드는 쾌감 속에서의 감정 집중, 그리곤 회한으로의 암울한 추락이라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쾌락을 맛보면서도 위험하게 불붙는 신경의 유희, 자기 육체에 도사린 본성을 사랑했다. 그렇지만 쾌락을 즐긴 뒤에는 그에 대한 의식과 수치심이 기묘하게 뒤섞여 후회라는 침전물, 도박의 역게임을 모색했다. 요컨대 수치심에서 결백을, 범죄행위에서 위험을 찾았다. 도스토옙스키의 감각기관은 모든 길을 삼키는 미로와 같았고, 하나의 육체 안에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지대였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카라마조프>의 상징성을 이해하게 되는데, 천사이자 성자인 알료사는 무서운 “환락의 거미‘인 표도르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환락은 정화를 낳고, 범죄는 위대함, 쾌락은 고통, 고통은 다시 쾌락을 낳는 것이다. 이 대립들은 영원히 접점을 이루고 있다.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사이에 바로 그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분열된 운명에 무한히, 아무런 저항 없이 몸을 내맡기는 운명에 대한 사랑은 그의 밝혀지기 힘든 유일한 비밀이며, 황홀경에 이르는 창조적 불꽃의 원천이다. 그에게 삶은 너무나 강렬했고, 고통 속에서 감정의 무한함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그는 대단히 선하고 불가해하며 신성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삶을 영원히 사랑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그의 가치척도는 바로 충만함과 무한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부드럽게 파도치는 삶의 항로를 원치 않았으며, 오로지 더 집중적이고 강렬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선과 악의 씨앗이었다. 그는 바로 열정과 패덕²⁾의 씨앗을 감동과 자기도취를 통해 승화시켰고, 위기에 직면해서도 그의 핏속에서 그것을 뿌리째 뽑아내지 못했다. 그의 도박사 본성은 정열의 한판 승부에 남김없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삶과 죽음이 좌우되는 빨간색과 검은색의 회전(回轉)³⁾을 볼 때만, 그는 달콤한 현기증을 일으키며 실존의 완벽한 환희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괴테는 ”너는 나를 그 안에 세웠지만, 다시 밖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자연에게 답한 바 있다. 하지만 운명을 피하거나 화해하고, ”운명을 개선하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조용한 가운데 완성이나 종결, 결말을 구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 삶의 상승만을 추구했다. 새로운 긴장감을 얻기 위해 그는 점점 더 감정을 고양했는데, 이는 자신을 이겨내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감정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괴테처럼 차갑고 단조롭게 움직이면서 혼돈을 반영하는 수정이 되기보다는 매일 자신을 새롭게 높이기 위해 자기파괴를 거듭하면서까지 불꽃으로 남고자 했다. 점점 더 강해진 힘과 첨예한 대립을 통해 불꽃이 되고자 했다.
그는 삶을 제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삶을 느끼려 했다. 그는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 운명의 광적인 노예이고자 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종“, 만물에 헌신하는 자로서 이제 그는 인간적인 것을 잘 아는 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운명에 대한 지배권을 운명에 되돌려 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삶은 우연적 시간을 넘어서 위대해질 수 있었다. 그는 영원히 힘들에 예속된 마법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시대를 문서화 하는 빛의 한가운데서 이미 지나갔다고 믿었던 신비로운 시대의 시인이 도스토옙스키라는 형상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는 진정 이 시대의 예언자이자 위대한 광인, 운명적 인간이었다.
이 거인의 모습에는 시대를 초월한 숭고함과 영웅적인 면모가 깃들어 있다. 시간의 저지대에서 솟아난 꽃동산처럼 다채로운 문학 작품들은 아직도 물론 근원적 형성력을 모여주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속됨에 따라 완만하게 서서히 정점을 향해 상승한다. 반면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창조의 절정은 환상적이며 우울한 빛을 띤다. 그것은 마치 화산에서 터져 나온 무익한 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갈라진 가슴의 분화구에서 우리 세계의 가장 깊은 핵심에 이르도록 용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여기에 모든 태초의 시발점, 원초적 자연력과의 연관성이 드러나는바, 우리는 전율하며 그의 운명과 작품 속에서 전 인류의 비밀스러운 깊이를 감지한다.
그는 운명에 대한 지배권을
운명에 되돌려 주었다.
[옮긴이 註]
1. 도락자(道樂者) : 술과 도박 따위 유흥에 취하거나 빠진 사람.
2. 패덕(悖德) : 도덕이나 의리 또는 올바른 도리에 어긋남. 또는 그런 행동.
3. 룰렛 게임을 뜻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