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도스토옙스키(V)
1821년 11월 11일~1881년 2월 9일
2025년 2월 9일은 도스토옙스키의 사망일이었습니다. 추모하는 뜻에서 작년 5월 우리 모임 FB 단체방에 올렸던 연재 글을 다시 읽습니다. R.I.P.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中 발췌④
운명의 의미(II)
톨스토이의 천재성이 다분히 건강 덕분이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은 악마의 저주와도 같은 간질병 덕분이었다. 간질은 평범한 감각에는 주어질 수 없는 집중화된 감정 상태에 이르도록 고양시켰고, 나아가 그에게 감정의 지하세계 및 영혼의 왕국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통찰력을 부여했다. 오랫동안 이곳저곳 유랑하며 지옥의 사자이기도 했던 오디세우스처럼 도스토옙스키 역시 그늘과 불꽃이 나라에서 홀로 깨어나 귀환한 사람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그는 뜨거운 피와 입가의 싸늘한 떨림을 가지고 삶과 죽음 사이의 전혀 예기치 못한 실존적 상황을 증명했다.
요컨대 간질병 덕분에 도스토옙스키는 예술의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이를 스탕달은 언젠가 “아직 표출되지 않은 감정의 창조”라고 설명한 바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서 아직 싹트지 않고 배아로 존재하는 감정들, 우리 혈관의 차가운 환경으로 인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감정들을 열대의 뜨거운 열기로 녹여서 표출했다. 병자들이 그렇듯이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그는 착란에 빠져들기 직전에 영혼의 마지막 말마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한, 예감의 순간이 다가오면 날카로워지는 신비한 눈은 그의 두 번째 얼굴이 지닌 예시자(豫示者)의 재능, 상호연관의 마술을 창조해냈다. 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처럼 놀라운 변전이 꽃피울 수 있다니!
예술가 도스토옙스키는 이제 그 모든 위험을 적절히 자제하고, 인간으로서도 새로운 척도에 의한 새로운 인간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행복과 고통은 감정의 두 극단인 동시에 고르지 않게 증대된 강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감정 상태를 평범한 삶의 일반적 가치를 가지고 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광란의 끓어오르는 정도를 가지고 측정했다. 어떤 사람에겐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거나 아내를 얻고, 조화를 느끼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지만, 이는 늘 현실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소유에 지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감각의 비등점은 이미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치명적인 것 속에 있었다. 거품을 물고 파르르 온몸을 떠는 경련, 그것이 바로 그의 행복이었다. 반면 그의 고통은 갑자기 무너져 내려 온몸의 기능을 상실하는 마비였다. 그런데도 이 모든 일은 지상에서는 오래 지속할 수 없는 번개처럼 압축된 본질적 상황들이었다.
삶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체험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강렬한 원초적 공포를 알고 있으며, 몸이 없는 것처럼 떠 있는 상태를 느껴본 사람은 결코 굳은 땅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보다 더 높은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법이다. 행복이란 개념은 그에게 경련을 의미하며, 고통의 개념은 전멸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의 작중 인물들의 행복에는 전혀 고양된 쾌활함이 없었다. 그보다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떨거나, 닥쳐올 위험에 대해 불안한 상태를 드러낸다. 이는 정말 견디거나 참기 어려운 상황으로, 즐긴다기보다는 오히려 고통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음울하고도 목을 죄는 듯한 불안, 근심과 공포의 일반적 감정 상태를 넘나드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얼음처럼 차갑지만, 미소에 가까운 명료함, 눈물이라곤 모르는 냉혹함에 대한 악마적 갈망, 메말라 키득거리는 웃음, 거의 쾌감이라고 할 만한 마귀의 비웃음 따위가 그러했다. 도스토옙스키 이전에 누구도 이처럼 상반된 감정을 극단으로 갈라놓은 사람이 없었다. 이 세계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양극단으로 팽팽하게 나눈 사람도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행복과 고통의 모든 일반적 가치 기준을 넘어서서 바로 황홀과 전멸이라는 새로운 극점을 세운 것이다.
운명이 새겨놓은 이 양극성을 통해서만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운명을 열렬히 긍정함으로써) 분열된 삶의 희생자였고, 따라서 삶의 대립에 대한 열광자였다. 그의 예술적 기질이 뜨겁게 달구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립의 요소들이 서로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마찰을 일으키는 데서 비롯된다. 그의 본성에 내재하는 무절제함은 타고난 분열적 요소들을 자극하여 하늘과 지옥으로까지 서로 벌려 놓았다. 작가 도스토옙스키 자신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대립물이었으며, 아마도 예술과 인류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이원론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상징적이지만 그의 패륜 가운데 하나는 자기 실존의 원초 의지를 가시적 형태로 드러낸다는 데 있다. 가장 좋은 본보기가 바로 도박을 병적으로 좋아한다는 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소년 시절부터 이미 카드놀이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유럽에 와서야 비로소 전신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악마의 거울을 알게 된다. 바로 저 흑적색의 룰렛 게임은 타고난 이원적 인간에겐 너무나 무섭고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 바덴바덴의 녹색 도박판, 몬테카를로의 도박장은 시스틴의 성모 마리아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남국의 풍경, 세계의 어떤 문화예술보다 그의 신경에 최면을 건, 유럽에서 그를 가장 황홀하게 하는 곳이었다. 그럴만한 것이 거기에는 긴장과 결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검정과 빨강, 홀수와 짝수, 행운과 불행, 이득과 손실이 매 순간 엇갈린다. 구르는 바퀴의 움직임에 따라 순간적으로 긴장이 감돌고, 이 튀어 오르는 대립물의 고통스럽고도 유쾌한 번개 형식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것이다. 참으로 그의 성격에도 부합되는데, 그의 불같은 조급함은 완만한 추이, 균형, 느릿한 상승을 견딜 수 없다. 그는 독일인들처럼 “소시지 만드는 식”으로 신중한 계획과 절약, 계산을 통해 돈을 벌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걸고 단번에 일확천금할 수 있는 우연성이 그를 자극했다.
운명이 그와 도박을 벌인 것처럼
그도 이제 운명과 도박을 벌인다.
그는 이 도박의 우연을 예술적 긴장으로 자극하고, 확신만 서면 떨리는 손으로 가진 것을 몽땅 녹색 도박판에 던진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에 대한 갈증 때문에 도박을 한다기보다는 탐욕의 진수만을 맛보고자 하는 전대미문의 천박한 카라마조프의 삶을 갈망해서였다. 또는 사기에 대한 병적 동경이나 “탑 꼭대기에서의 아슬아슬한 느낌”, 심연을 향해 몸을 구부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도박하며 운명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가 도박에 건 것은 돈이나 마지막 판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가 도박에서 얻은 것은 극도의 신경마비나 치명적인 전율, 원초적인 불안, 마법적 세계에 대한 느낌이었다. 천부적 재능을 타고 태어났으면서도 도스토옙스키는 신성에 대한 새로운 갈증에 취해 있었다. 물론 그가 다른 일들에서처럼 열정을 도박에서는 과도하게 이끌어 극단적인 상태에까지, 심지어 패륜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선이 굵은 기질의 그에겐 머뭇거리거나 조심하고, 신중을 기하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는 평생 한계를 넘어섰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렇게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예술적으로는 위대함을, 반면에 인간적으로는 위험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는 시민적 도덕의 울타리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어느 사람도 그의 삶이 법적 경계를 얼마나 벗어났는지,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범죄적 본능이 얼마나 그의 내부에 도사리던 행위였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몇 가지는 증명되었으나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어린 시절 카드놀이를 하며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죄와 벌>의 비극적인 바보 마르멜라도프가 화주를 마시려고 아내의 양말을 훔치듯, 도스토옙스키도 룰렛 게임의 판돈을 마련하려고 장롱에서 돈과 옷을 훔쳤다.
어떻게 <지하생활자>의 시절 그의 감각적 파행이 성도착으로까지 넘어서게 되었는지, 또한 그의 소설 인물들인 슈비드리가일로프, 스타브로긴,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욕정과 관련하여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은 어느 정도 성적 환란 속에서 지냈는지 전기 작가로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성향과 성도착 역시 타락과 결백이라는 비밀스러운 대조를 느끼게 하지만, 소문이나 추측만으로 (그것이 명백하다 해도)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그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구세주이자 성자인 알료사와 그의 만만치 않은 호색의 적수, 지나치게 성을 밝히는 추잡한 표도르가 서로 혈연관계라는 사실을 조금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말 확실한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관능적인 면에서 일반 시민의 척도를 한층 넘어섰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추행과 범죄의 기질이 자신의 내부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괴테의 유명한 말의 온건한 의미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럴 것이 괴테의 예리한 자기발견은 위험하게 자라고 있는 맹아를 내면에서부터 뿌리 뽑으려는 자신의 대단한 노력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