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 11. 11 ~1881. 2. 9
2025년 2월 9일은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습니다. 추모하는 뜻에서 작년 5월 우리 모임 FB 단체방에 올렸던 연재 글을 다시 읽습니다. R.I.P.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中 발췌⑨
사랑을 자로 재려는 자가
어떻게 사랑을 알겠는가!
(라 보에티)
건축술과 열정(I)
“당신은 모든 것을 열정으로 몰고 가는군요!” 나스타샤 필리포프냐의 이 말은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인물에게 적용되는 말인 동시에 무엇보다 자기 자신, 그의 영혼의 정곡을 찌른다. 이 강력한 존재는 삶의 여러 현상에 늘 열정적으로 대처한다. 이런 까닭에 그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가장 열정적일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창조적 과정이나 예술적 노력은 조용하고 질서 있게 구성되고, 냉철하게 계산된 건축술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열병을 앓는 가운데 사색하고 생활하듯, 그는 열기 속에서 글을 쓴다. 그는 작은 진주 구슬을 굴리듯 종이 위로 낱말들을 재빨리 흘린다. 그럴 때면 손목의 맥박은 평소보다 두 배로 뛴다(열정적 인간들이 그랬듯이 신경질적으로 글을 빨리 쓴다).
무엇인가 창조한다는 것은
황홀, 고통, 환희, 매혹, 파괴이고,
동시에 고통으로 고양된 쾌락,
쾌락으로 고양된 고통이다.
22세의 그는 “눈물을 흘리며”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썼고, 그 이후의 모든 작업은 위기와 질병을 거듭 동반한다. “나는 고통과 근심으로 예민해져 글을 쓴다. 힘겹게 작업할지라도 육체적으로는 병들어 있다.” 실제로 그의 신비로운 질병인 간질은 뜨겁고 도취적인 리듬으로 암울하고 답답한 마비 증세를 보이며 그의 작품의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그는 늘 발작의 고통 속에서 사력을 다해 창작에 매달린다. 신문 기사처럼 지극히 세밀하고 딱딱해 보이는 부분까지도 대장간의 뜨거운 화덕에 부어져 새롭게 주조된다.
그는 단순히 창조력의 분리된 부분, 자유롭게 작용하는 단면만을 가지고 손쉽게 작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늘 자신의 물리적 자극을 사건으로 부풀어 오르게 한다. 그리하여 신경이 저리도록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마침내 작중인물을 탄생시킨다. 그의 모든 작품 인물들은 마치 엄청난 기압에 의해 폭발하듯 격정의 벼락들 사이를 지나간다. 그에게 창작이란 내적, 심정적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스탕달에 대한 다음 명언은 그에게 통용된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영혼도 없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열정이란 무엇인가 형성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파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열정은 혼돈의 힘만을 창출하지만, 정신이 명쾌할 경우 불멸의 형식을 구해내기도 한다. 모든 예술은 창작의 동인으로서 불안을 필요로 하지만, 완성을 위해서는 조용히 휴식하며 명상하는 것도 필요하다. 도스토옙스키의 현실을 강력하게 투사하는 정신의 명료함은 위대한 예술품을 두르는 대리석이나 놋쇠의 냉정함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위대한 건축양식을 사랑하고 숭배하며, 세계상에 대한 탁월한 척도 및 고귀한 질서를 설계한다.
하지만 항상 열정이 넘쳐서 기반을 무너트린다. 객관성을 창출하려는 예술가로서도, 외부에 머물며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형상화하는 서술자로서도, 사건을 보고하고 감정을 분석하는 서사 작가로서도 그의 노력은 헛되고 말았다. 고통과 이에 대한 공감에 빠진 채 그의 열정은 자신만의 주관적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간다. 완성된 작품조차도 초기의 혼돈으로부터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한다(그의 은밀한 사상을 노출하는 이반 카라마조프는 “나는 조화를 증오한다”라고 외친다). 형식과 의지 사이에 화평이나 타협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의 영원한 균열만이 있을 뿐으로, 모든 형식은 차가운 껍질에서 뜨거운 핵심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외부와 내부 사이에 끊임없는 투쟁이 있을 따름이다. 그의 본질의 끊임없는 이원성은 서사작품에서 건축술과 열정의 투쟁이라고 불린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소설들에서 소위 전문용어로 ‘서사적 해설’이라 할 수 있는 것, 감동적인 사건을 조용한 서술로 억제하는 서사적 비법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서사시인 호머에서 고트프리트 켈러와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연속적 흐름으로 대가들 사이에 계승되어 온 것이다.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열정적인 세계를 구축했고, 따라서 독자 역시 열정을 가지고 흥분해야만 그 세계를 누릴 수 있다. 독자는 질병을 물려받듯 그의 인물들의 위기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러면 독자들은 짜릿한 흥분 속에서 카타르시스라도 체험하는 것 같은 상태를 맛본다.
그는 우리의 오감을 자극함으로써 그의 불타는 대기 속으로 빠져들게 하며, 영혼의 나락 끝으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거기서 우리는 감정의 혼란에 빠진 채 가쁜 숨을 헐떡이며 서 있게 된다. 그의 인물들의 박동처럼 맥박이 뛸 때야 비로소 우리 역시 그의 마법적 열정에 귀속된다. 그럴 때야 비로소 그의 작품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역시 그의 작품에 완전히 속하게 된다. 그럼에도 부인되거나 은폐 또는 미화될 수 없는 사실은 그와 독자의 관계가 친밀하거나 유쾌한 사이가 아니라 위태롭고 두려운, 환락본능에 가득 찬 불화의 관계라는 점이다. 이는 다른 작가들의 경우처럼 우정과 신뢰의 관계가 아니라,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와도 흡사하다.
디킨스, 켈러와 그의 동시대 작가들은 부드러운 설득, 음악적 유혹으로 독자를 그들의 세계로 조용히 인도한다. 그들은 친근하게 담소하며 독자를 사건 속으로 끌어들인다. 열정적 인간 도스토옙스키는 단순히 우리의 호기심이나 흥미를 끌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우리의 육체까지도 몽땅 소유하려고 열망한다. 우선 그는 내면의 대기를 충전시키고 나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되게 고취한다. 그의 열정적 의지 속에 들어가면 일종의 최면상태, 의지의 상실이 발생한다. 그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무한히 대화를 지속함으로써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나아가 비밀과 암시를 통해 우리에게 관여함으로써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자극한다. 그는 독자가 너무 일찍 작품에 몰입하는 것도 참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준비단계의 고통을 느긋하게 즐긴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 불안이 조용히 작품에 관한 관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항상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거나 새로운 이미지를 펼치기를 주저한다. 새로운 이미지를 펼치기를 주저한다. 사건에 대한 통찰의 기회 또한 지연시킨다. 성에 대해 잘 아는 쾌락주의자 도스토옙스키는 악마적인 의지력으로 자신과 독자가 작품에 몰입하는 것을 억제하고, 그럼으로써 내부의 압력, 내적 대기의 흥분상태를 상승시킨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 독자는 이 모든 무의미한 영적 상태가 살인의 준비단계였다는 사실을 예리한 신경으로 미리 감지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확실히 알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의 감각적 환희는 세련되기 위한 지연과정을 거쳐 감동에 이르고, 작은 암시들을 바늘로 찌르듯 감각의 표피 안으로 찔러 넣는다. 그는 악마처럼 고약한 지연단계를 준비하는데, 어떤 거창한 장면을 연출하기에 앞서 여러 페이지에 걸쳐 신비하고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지루한 묘사를 늘어놓는다. 그리하여 다른 인물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자극적 인물의 내부에 정신적 열병, 심리적 고통이 발생하도록 한다. 과열된 솥처럼 가슴에 눌려 있는 감정이 끓어올라 분출되려고 할 때야 비로소 그는 망치로 독자의 가슴을 때린다. 그러면 독자는 천상의 구원이 번갯불처럼 그의 가슴속으로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 황홀에 몸을 떨며 쓰러진다. 더는 견딜 수 없는 긴장 상태에 이르러서야 도스토옙스키는 서사적 비밀을 찢어내고, 긴자에서 풀려난 감정을 눈물에 젖은 촉촉한 감각 내부로 흘러들게 한다.
그는 독자를 적대적인 동시에 쾌락적이고 세련된 열정으로 사로잡아 자신의 주변에 둔다. 격투를 벌일 때면 그는 독자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처럼 몇 시간이고 그의 희생물 주변을 돌다가 돌연 찰나의 순간에 심장을 찌른다. 그의 기술은 폭발의 기술이다. 짐꾼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한 삽씩 길을 파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막힌 가슴을 뚫어 구원하듯 그 안에서 단번에 폭탄으로 세계를 부수어 연다. 흡사 음모를 꾸미듯 그의 준비과정은 완전히 비밀리에 진행된다. 독자는 재앙을 향해 가고 있는 인물이 있다고 느끼지만, 정작 그가 어떤 인물 속으로 갱도를 파 들어가고 있는지, 어느 쪽에서 언제 무서운 폭발이 일어날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인물들 각자로부터 갱도는 사건의 중심부로 향하고, 각자에게는 열정이라는 가연성 연료가 주어진다. 하지만 그것에 불을 붙이는 자는 작가가 독자에게 아무리 암시를 할지라도 최종적 순간까지 기발한 수법으로 숨어서 절대로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여러 인물 가운데 그의 내적 사상에 중독된 자를 살해한다).
여기서 우리는 운명이 두더지처럼 삶의 지층을 파 내려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아니, 우리의 가슴속으로 갱도가 파고들어 오는 것처럼 느끼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번개처럼 우울한 대기를 가르는 찰나의 순간까지 무한히 긴장하며 애간장을 태운다. 서사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이 상황의 집중화를 위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묘사의 무게와 넓이가 필요하다. 기념비적 예술만이 그런 강도와 집중을 추구할 수 있고, 세속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무게를 획득할 수 있다. 여기서 넓이란 서술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는 뜻이 아니라 건축술을 의미한다. 즉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거대한 초석이 요구되는 것처럼 그의 소설에서도 정점에 이르기 위해 다차원적 기본설정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소설들은 볼가강과 드네프르강처럼 고향의 큰 강줄기 역할을 한다.
요컨대 강줄기 같은 어떤 것이 그의 모든 소설의 고유한 성격이다. 그의 소설들은 서서히 물결치며 수많은 인생사에 접근해 간다. 그 수많은 지면에서 때로는 예술적 형상의 강둑을 넘어 정치적 자갈이나 논쟁의 바위를 만나기도 하고, 영감이 줄어들 때는 모래사장에서 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영감은 이미 말라버린 것처럼 보인다. 정지된 과정에서 사건들은 이리저리 얽혀서 난맥상을 보이고, 열정의 깊이와 생동성을 되찾을 때까지 물결은 한동안 대화의 모래톱에 막혀 정체된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근처에 이르러 돌연 저 엄청난 급류의 지형들이 나타나고, 거기서 길게 이어온 이야기가 소용돌이치며 맴돌게 된다. 이제 소설의 지면이 쏜살같이 넘어가고, 템포 또한 요동치며, 고용했던 영혼은 온통 고무되어 감정의 심연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미 독자는 깊은 웅덩이가 가까이 있음을 감지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무거운 흙덩이는 갑자기 거품을 내며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이야기의 흐름은 흡사 자석에 이끌리듯 폭포수에 편입되고, 이어 카타르시스가 생겨나면서 독자는 무의식적으로 더욱 책장을 빨리 넘긴다. 감정의 폭발이 일어난 듯 사건의 심연 속으로 갑자기 돌진해 들어간다.
이렇게 삶의 총체를 독특한 암호로 결집하는 감정, 극단적으로 집중된 감정은 고통스럽고 혼란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도스토옙스키는 이를 “탑 꼭대기에서의 아슬아슬한 감정”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아마도 이런 감정은 자신의 내적 깊이에 굴복하고, 치명적인 추락을 행복으로 예감하며 누리려는 신적 광기에 속할 것이다. 생명을 다 바쳐 죽음을 느껴 보는 이런 극단적 감정은 그의 대서사시적 피라미드의 보이지 않는 정점이기도 하다. 그의 모든 소설은 차갑게 불타는 느낌의 한순간을 위해 집필되었을 뿐이다. 그는 이런 장면을 20여 군데에서 장엄하게 창출하는데, 그 장면들은 하나같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열정의 포화상태를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별 저항 없이 처음 대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네다섯 번 읽는 독자에게도 그런 느낌은 화염처럼 가슴을 꿰뚫는다. 이런 순간이면 언제나 작중인물들이 돌연 방 하나에 집결하여 자기 고유의지의 총화를 한껏 표출하는 듯하다. 모든 거리, 강, 힘이 마술처럼 한데 집결해서는, 이어서 하나의 고유한 몸짓과 행동, 언어 속에서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다. <악령>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르는데, 이때 샤토프가 때리는 따귀는 아주 “냉혹한 일격”인 것으로, 복잡다단한 사건의 거미집을 일거에 찢어 버린다. 이는 <백치>에서 나스타샤 필리포프나가 10만 루블을 불 속에 던져버리는 것과 비견되고,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에서의 고백 장면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예술에 있어 소재와 관련된 순간이 아니라 지극히 본질적인 순간에 그의 건축술과 열정이 함께 어우러진다. 도스토옙스키는 황홀경 속에서만 통일적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이 짧은 순간에만 완벽한 예술가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순수 예술적으로 인간을 넘어선 예술의 승리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시 작품을 읽을 때야 비로소 최고의 정점을 향한 상승이 얼마나 천재적인 계산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천 갈래로 분화되고 상호 교차한 복합적 비유들이 갑자기 미분화된 숫자, 감정의 최종적 통일인 황홀경으로 용해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예술이 지닌 가장 신비한 비밀이다. 그의 소설들은 절정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며, 그런 가운데 감정의 대기가 전기충전을 받아 집중되고, 운명의 번개를 자체 내에 확실하게 받아들인다. 도스토옙스키가 이전의 그 누구도 소유해 보지 못했고 장래의 어떤 예술가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할 이 고유한 예술형식의 근원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이런 전체적 생명력의 발휘가 예술의 변화된 형식, 즉 작가 자신의 삶과 고질적 질병의 분명한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하는가?.... <건축술과 열정(II)>에서 계속.
열정적 인간 도스토옙스키는 단순히 우리의 호기심이나 흥미를 끌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우리의 육체까지도 몽땅 소유하려고 열망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을 구상하며 주인공과 배경을 스케치하곤 했다.『죄와 벌』초고 에도 스케치가 여러 장 남아있다. 작가가 생각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