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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도스토옙스키(X)

1821. 11. 11 ~1881. 2. 9

by 김양훈
2025년 2월 9일은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습니다. 추모하는 뜻에서 작년 5월 우리 모임 FB 단체방에 올렸던 연재 글을 다시 읽습니다. R.I.P.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中 발췌⑩
사랑을 자로 재려는 자가
어떻게 사랑을 알겠는가!
(라 보에티¹)

건축술과 열정(II)

예술가의 고통이 간질의 예술적 변형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도스토옙스키 이전에는 삶의 충일과도 유사한 집중이 시공의 가장 밀폐된 한도로까지 접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메노프스키 광장²에 서 있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2분가량 완전히 잊어버린 삶을 다시 한번 체험한 바 있다. 그는 간질의 발작 때마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지는 몇 초 동안 세상의 환상을 맛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시간의 호두껍질 속에 사건의 우주를 파묻어 넣을 수 있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이런 폭발적 순간의 환상을 마귀처럼 너무 집요하게 현실화하고자 했기에, 우리는 그의 시공 극복의 능력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단적으로 말해 집중의 진정한 기적은 그의 작품들인 것이다.

<백치>의 삽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독자는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 <백치>의 제1권을 읽는다. 운명의 혼란이 승화되고, 영혼의 혼돈은 지나가 버렸으며, 많은 인간이 내적으로 생기를 되찾는다. 독자는 인물들과 함께 거리를 배회하거나 집에서 앉아 있다가 우연히 전체 사건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12시간 안에 일어났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카라마조프>의 환상세계는 단지 며칠 내에 일어난 일이며 <죄와 벌>의 경우도 1주일 이내로 사건이 집약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들은 압축의 걸작들인 것으로, 이제까지 그 어떤 서사작가도 도달한 바 없었고, 어떤 삶도 이루어낼 수 없었다.


유일하게 <오이디푸스>라는 고대비극은 정오부터 저녁까지로 제한된 긴장 속에서 전 생애와 지나간 세대를 압축하고 있다. 이 비극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곤두박질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신적 재앙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 역시 체험하게 한다. 따라서 어떤 서사 작품도 이런 비극에는 거의 필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는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는 비극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마치 변형되고 포장된 드라마처럼 작용한다. 결국 <카라마조프>는 그리스 비극의 정신과 셰익스피어의 핵심을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내적으로 아무 저항 없이 함께 벌거벗고 서 있는 셈이다. 아니, 운명의 비극적 하늘 아래 버티고 서 있는 거인이라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역시 열정적 몰락의 순간 갑자기 서사적 성격을 상실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빈약한 서사적 색채는 감정의 열기에 녹아 증발한다. 냉정하게 진행되는 대화 외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의 소설에서 명장면들은 순수극적인³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화들은 말 한마디 가감 없이 무대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밀도 있게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개개의 등장인물이 확정되면, 소설들의 서사적 내용은 대화를 통해 극적 순간으로 응축된다. 항상 종국을 향하는 그의 비극적 정서는 짜릿한 긴장, 번갯불 같은 방전을 동반하면서 정점에 이르러서는 서사 예술의 요소를 거의 극적으로 변형시킨다.


이런 장면들 가운데 극적 폭발력을 갖춘 내용을 너무 성급한 연극인들과 공연자들이 문헌학자보다 먼저 인식한 나머지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에서 추려낸 몇 편의 연극을 재빨리 공연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입증된 바와 같이 도스토옙스키의 작중인물을 외부에서, 즉 그들의 육체와 운명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던 그들의 시도는 비참했다. 그의 인물들을 소설 영역에서 밖으로 끌어내고, 자극으로 충만한 영혼의 격정적 대기와 분리하려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연극에 등장한 인물들은 생동감 있게 살랑거리며 하늘과 맞닿아 있는 나무 우듬지와 비교하면 보잘것없었다. 그들은 마치 껍질이 벗겨진 나무줄기처럼 발가벗고 생기를 잃은 채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그들 각자는 신경의 무수한 가닥을 은밀히 내밀어 서사적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심리학은 눈부신 램프 불빛을 위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작품의 개작자 또는 단순하게 만든 각색자를 비웃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서사적 지하세계에는 신비한 영적 접촉과 어두운 물결,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눈에 보이는 몸짓이 아니라 수천 개의 개별 암시로부터 인물이 형성되고 구체화된다. 거미줄처럼 섬세한 어떤 것도 영혼의 그물로 짜인 문학을 인식할 수 없다. 이런 피하조직 아래 서술의 물결이 흘러가는 통로를 느껴보기 위해, 우리는 시험 삼아 그의 소설의 프랑스어 축소판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면 그 안에 빠트린 것이 없어 보인다. 사선 진행의 영상도 빠르고, 인물들은 더욱 민첩하고 완벽하며 열정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딘가 빈약해 보인다. 그들의 영혼에는 찬란한 빛이 빠져 있고, 대기에는 전기의 방전 같은 것이 없다. 무거운 긴장감 또한 없는데, 긴장의 무게를 지나치게 완화하고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 또한, 무엇인가 파괴되어 버려서 마법의 순환은 더 망가진 채 회복 불능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축소와 극화의 시도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작품의 서사문학적 포괄성의 의미, 외관상 장황해 보이는 문체의 의도를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완전히 우연적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세부적, 임의적 암시들이 나중에 100 또는 200페이지에 걸쳐 대답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서술의 표면 아래 은밀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보고가 전달되면서 비밀스러운 반영을 상호 교환한다. 두세 번 그의 작품을 접할 때야 비로소 정신적 암호나 아주 섬세한 심리적 특징, 그 의미가 알려지는 것이다. 어떤 서사 작가도 이런 민감한 서술체계를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작가도 스토리의 전개구조와 대화의 표면 아래 이토록 은밀한 사건의 혼란을 감추어 둔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의 서술구조를 체계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비밀스러운 질서가 내재하여 있고, 따라서 이런 사실만으로는 그의 특유의 심리적 과정과 비교할 수 없다.


다른 서사 작가들, 특히 괴테는 인간보다 자연의 모방에 치중하면서 사건을 한편으론 식물의 생태처럼 유기적으로, 다른 한편으론 풍경처럼 조형적으로 감상하게 만든다. 이와는 달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아주 깊이 있고 열정적인 인간과 만날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예술작품은 그 영원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현세적이다. 그의 작품은 영혼이 육체의 한계 내에 존재하듯이 계산이나 측량할 수 없으며, 예술형식에서도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들 자체가 모두 완벽한 예술작품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소설들은 물론 스케일이 작고 단순한 수준에 만족하는 그런 형편없는 작품들보다는 훨씬 빼어난 것이 사실이다. 늘 척도를 넘어서는 그가 영원성에 도달하고 있으나, 괴테처럼 모방하고 형성하는 문학에는 서투르다. 그런데 성급하기 짝이 없는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예술의 비극성으로 말미암아 다시 삶으로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적 운명에 의한 것이고, 발자크처럼 내적 경박함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삶은 그에게 작품을 완벽하게 형상화하도록 그를 부추기고 지나치게 재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잊지 않는다. 언제나 소설 판권을 팔아넘긴 상태에서 그는 소설 첫머리를 집필했고, 모든 작업은 항상 쫓기며 가불에서 가불로 이어졌다. 도피 중에도 그는 “늙은 우편배달 말”처럼 일하면서 마지막 탈고를 구상할 여유나 휴식도 없었다. 이렇게 된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장본인은 이 무슨 “죄악!”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한 적도 있다. 그는 격분해서 외쳤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일하는지 보시오! 당신들은 내게 흠 하나 없는 걸작을 요구하는데, 나는 지독한 가난과 비참 속에서 작업을 서두르도록 강요받고 있소.”


그는 안락하게 재산을 소유하면서 원고를 다듬고 정리할 수 있는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를 저주했다. 그 외에는 질투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그는 가난을 개인적으로 꺼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 무산계급으로 전락한 이 예술가는 때때로 “지주계층의 문학가”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틈틈이 쉬어가며 작품완성에 몰두할 수 있는 예술적 여건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부러움의 발로였다. 그는 자기 작품에 나오는 모든 오류를 잘 알고 있었다. 간질 발작 이후 긴장이 풀어지고, 따라서 작품을 두른 껍질이 헐헐해지거나 자신의 신경이 무뎌지게 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종종 친구들과 그의 아내는 그가 원고를 읽을 때 거듭되는 그의 지독한 건망증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간질 발작 이후 발생하는 감각의 둔화에 의한 증상이었다. 무산자인 그는 날품팔이, 가불의 노예로서 지독한 가난이 세월 속에서도 세 편의 방대한 소설을 연속해서 발표했다. 빈곤했지만 그는 내적으로 의식이 철저한 예술가였다.


그는 금을 세공하는 일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그것은 완성을 위한 작업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가난의 채찍 아래서 그는 몇 시간이고 한 페이지를 놓고서 고치고 다듬는 일을 반복했다. 소설 <백치>는 아내가 굶주리고 산파에게는 돈도 지급하지 못했는데 두 번이나 없애려고 했다. 그의 완성을 향한 의지는 무한했지만, 가난은 끝이 없었다. 또다시 두 개의 강력한 힘, 외적 압박과 내적 압박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예술가로서도 이원성에 시달리는 분열된 사람이었다. 인간으로서 조화와 평온을 갈망했다면, 예술가로서의 그는 완성을 열망했다. 곳곳에서 그는 비참한 사람들과 함께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고향이 없는 자에게는 고향이 무의미하듯 이원적이 아닌 하나의 예술도 분열의 십자가를 진 그에게는 구원이 아니라 고통, 불안, 증오, 저주이다. 그런데 열정은 그의 형상화의 욕구를 자극하고, 완성을 향한 의지로 그를 몰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완성을 넘어서서 영원한 것을 향하도록 강요당한다(이는 성급한 열정의 결과라 하겠는데, 집필도 안 된 <카라마조프>와 <죄와 벌>의 제2부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소설이라는 그의 건축물은 완공도 되지 않은 탑을 가지고 영원한 의문의 구름 속으로 솟아오른다. 그것을 더 소설이라 부르지 말고, 서사적 척도로 평가하지도 말자. 그것은 더는 문학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인간 신화의 어떤 신비로운 발단, 예고, 전주곡, 예언이다. 모든 러시아의 선조들처럼 그는 예술을 신에 대한 인간 고백의 중개자로 느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고골은 문학을 “죽은 영혼”을 향해 던져 버리고, 신비주의자로서 새로운 러시아의 사도가 되었다. 60세에 이른 톨스토이는 자신과 타인의 예술을 저주하고, 선과 정의의 복음 전도사가 되었다. 고리키는 명예를 포기하고 혁명의 예고자가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최후의 순간까지 펜대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형상화한 것은 현세적 좁은 의미의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러시아의 신화, 어두운 비밀로 가득 찬 묵시록적 계시이다. 그리고 바로 이 계시가 그들에게서 예감되고 헛된 형식으로 주조되지 않았기에, 그것은 인간과 인류 전체의 완성을 향한 도정이다.


고향이 없는 자에게는
고향이 무의미하듯이
그는 비참한 사람들과 함께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다.


[옮긴이 註]


1) 에티엔 드 라 보에티(Étienne de La Boétie, 1530년-1563년)는 프랑스의 판사이자 작가 그리고 프랑스 근대 정치철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철학자 몽테뉴의 친구로 《자발적 복종》(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을 집필하였다.


최초의 아나키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에티엔느 라 보에티(Etienne or Estienne de La Boetie, 1530~1563)의 <자발적 복종>은 1547년 그가 17세 때 오를레앙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졸업논문 같은 것으로 쓰인 것이나, 1563년 그가 33세로 죽기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그 책을 쓴 동기는 라 보에티가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귀옌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전제군주를 보면서 절대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에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

그의 친구인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에 친구의 글을 실을 예정이었으나, 이미 칼빈파에 의해 이용되었기 때문에 실을 수 없었고, 결국 저자 사후 11년이 지난 1574년에야 익명으로 겨우 출판되었다. 그 글은 2세기가 지난 뒤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절대권력에 대부분 사람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때 그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지주가 되었다.


라 보에티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자유롭고 평등하지만, 그것을 잊지 않고 스스로 지켜낼 때만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고귀한 가치를 비로소 누릴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점에서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의심할 수 있겠으며, 우리 모두를 하나의 무리로 만들어준 자연이 그 무리 가운데서 누군가를 노예로 예정해 두었다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유는 자연의 길이고, 내가 보기에 우리는 자유를 지니고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지키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자연은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완전히 하나이길 바랐으니, 우리가 천부적으로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동등한 동반자이며, 우리 중 그 누구도 굴종의 속성을 타고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본래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사실을 잊었기에 전제정치가 대중적 동의 위에 성립한다. “독재자에게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민중의 선출로 권력을 부여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자, 무력으로 나라를 차지해 통치하는 자, 권력을 상속받아 군림하는 자.” “독재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혼자이고, 사랑받을 만한 어떤 장점도 지니지 않았다. 그는 민중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잔혹할 뿐이다.” “폭군들은 많이 빼앗으면 빼앗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무너뜨리고 넘어뜨리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더 많이 낭비하고 더 많이 처먹는다. 그러면 그들은 점점 더 강성해져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무너뜨릴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치지 않고, 아무도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들과 맞서 싸워 쓰러뜨리려 하지 않아도 그들은 벌거벗고 파멸할 것이다.”


라 보에티는 사람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고 해도 단지 견뎌내기를 멈추기만 해도 독재자는 그들에게 어떤 해악도 끼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인민이며, 확실하게 지키는 것도 바로 인민이기 때문에 인민들은 봉사하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속박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종속의 책임도 인민에게 있고, 자신의 목줄을 끊는 것도 바로 인민이다. 인민들에게는 속박과 자유의 선택권이 주어져 있고, 자유와 멍에를 뒤집어쓰면서 온갖 불행을 끌어안을 것이냐 아니면 정말로 자유를 찾아 나설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바로 인민의 몫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대중이여! 제정신을 잃어버린 대중이여! 국가는 여러분에게 고통을 철저하게 강요하면서도 여러분의 복리에는 눈을 감는데도, 여러분은 소득에서 가장 좋고 훌륭한 몫을 눈앞에서 빼앗겨 집안은 점차 쇠잔해지고, 물려받은 가보들을 도둑맞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는 적 때문에, 재산을 소유한 모든 자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 결심하라, 더 이상 그들에게 봉사하지 말고 자유를 얻어라.” “자연이 누구에게는 더 큰 몫을 주고 누구에게는 더욱 적게 허락한 것은 이들 사이에서 형제애를 일깨워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남을 도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2) 도스토옙스키가 184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메노프스키 광장에서 집행되기로 했던 사형이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고 감형되던 날, 그는 자신의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무의미한 일들에 얼마나 많은 것을 허비했는지, 내가 어리석은 행동, 잘못, 게으름, 무능력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헤매고 있었는지, 내 삶에 얼마나 감사한지, 내 마음과 영혼에 얼마나 자주 죄를 범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낍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또한, 삶은 행복이며 매 순간은 영원한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젊어서 알았더라면!“


*세메노프스키 연대는 니콜라이1세의 즉위식 날이었던 1825년 12월 14일, 원로원광장에서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일으켰던 왕실 근위 연대였다.


3) 순수극(純粹劇) : 순수 예술 목적으로 쓰이는 극(Serious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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