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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 특별중대

[제주4·3이야기] 서북청년단③

by 김양훈

제주4·3항쟁 기간 동안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악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섬사람들은 그들을 ‘서청’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다. 제주4·3 와중에 ‘서청특별중대’라 불리는 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서북청년단원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군번 없이 경비대나 민간복장을 한 특별중대는 주로 성산포 일대에 주둔하며 온갖 죄명을 씌워 무고한 양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서청특별중대가 임시감옥으로 사용하던 감자창고

15년 전 77세이던 윤종선 할아버지는 4·3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서청특별중대 감자창고 고문실 바로 앞에 집이 있었다. 매일 밤 벌어지는 고문과 비명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감자창고에 임시 마련된 특별중대원 식당에서 일했다. 윤종선 할아버지가 증언했다.


"성산포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학교 동쪽의 주정공장과 간스매 공장, 옥도정기를 만들었던 감태공장이 있었주. 4·3이 나난 서청특별중대는 이런 시설을 이용하여 사무실로도 쓰고, 잡아온 사람들을 가두어 고문한 후 터진목이나 우뭇개에 데려당 팡팡 총살해 부렀주. 이북말을 쓰는 서청특별중대원들은 군복입은 놈, 사복입은 놈 등 복장도 각양각색이라. 총은 거의 99식을 들고 다녔는데 너무 무서워서 '이북놈 왐쪄' 허멍 봐지민 피해 부렀주." ‘육지 것’이란 욕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서청특별중대 주둔지였던 성산국민학교

‘특별중대는’ 2연대 소속이었다. 일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계급장도 없었다. 이 악몽의 특별중대는 당시엔 ‘동국민학교’라 불렀던 성산국민학교에 1년 정도 주둔했다. 그리고 학교 담 너머에 있던 주정공장 창고를 임시 수감장소로 사용했다. 성산면은 물론 이웃한 구좌면과 표선면의 수많은 주민들이 이 창고에 갇혔다가 ‘터진목’이나‘우뭇개’로 끌려가 학살됐다.


성산포 출신 김석교 詩人이 그날의 아픔을 기억한 詩 ‘숨비기꽃’이 있다.


숨비기꽃

-1949년, 성산포의 기억

잘 있거라, 하늬바람 오금 조이던 터진목

우리 무참히 총 맞아

2연대 서청중대 군홧발에 짓밟힐 때

마지막 바라보던 수평선

땡볕 푸르던 여름날

무덤 이룬 모래굴헝 뒤엎으며

그 아릿한 내음 펄펄

숨부기, 옛사랑 보라꽃 피우느니

말미오름에서 바우오름에서

큰물뫼 족은 물뫼 모구리오름에서

개처럼 끌려와 피멍울 새긴 모살동네

통일 어느 날 서북사람들 찾아와

무심히 사진기 누를 때

그들에게로나 빙의할까

네 불휘 이끄는 대로

우리 비로소 해원할까

듬북할미 입술 푸른

보제기 나의 꽃

숨비기꽃

성산면 일대에서 벌인 그들, 특별중대의 만행을 고발한 제민일보의 取材記事가 있다. 그 중에서 성산리와 오조리, 그리고 시흥리와 고성리의 참상을 옮긴다.


초토화작전②-城山面

제민일보 2007년 2월 27일

성산리(城山里)
서청 특별중대-잔혹상 극심

바다를 향해 감자 모양으로 불룩 튀어 난 성산면 성산리. 좁은 길목인 ‘터진목’만 지키면 오도 가도 못하는 곳이다. 당시엔 면사무소 소재지였고 토벌대 주둔지였다. 서청 특별중대가 주둔한 성산국민학교나 면사무소 옆 주정공장 창고는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죽음을 맞기 전에 대기하는 곳이었다.

터진목을 경계로 토벌대의 완벽한 통제 안에 있는 마을이었지만 4·3의 광풍은 성산리 주민들에게도 불어 닥쳤다. 주민 희생은 9연대 시절인 1948년 11월 29일 신수길(愼垂吉, 29)이 총살당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마을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은 서청이 무장을 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대한청년단 훈련부장임이었던 이기선 씨는 “서청 특별중대는 과거 감정이 있던 주민들에게 멋대로 죄명을 씌워 처형했다.”면서 “나도 몇 번 끌려가 손과 발이 묶인 채 장작으로 맞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고문이 심했다.”고 증언했다.


대한청년단 훈련부장이 이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1949년 1월 2일에는 송기공(宋基公, 33) 강춘신(康春新, 24) 강승홍(20) 임재삼 등이 희생됐다. 1월 중순께는 임영전(林永傳, 24) 홍두종(洪斗宗, 16)이 터진목으로 끌려가 학살됐다. 현순녀(玄順女, 48)는 닭을 내놓으라는 서청의 요구를 거부했다. 앙심을 품은 서청은 1월 19일 현순녀가 통금시간을 어겼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초소 부근에서 총살했다.


성산면 대동청년단장이었던 고성중(高成重, 작고) 씨는 성산면 뿐 아니라 제주도 전체에서 대표적인 우익 인사 중 한사람이었다. 그런 고씨도 한 번은 서청의 감정을 사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말했다. 고 씨는 또 서청의 비행에 대해 생전에 취재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청은 참으로 지독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찰이 나서서 일시 가두기까지 했겠습니까.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청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 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서청의 행태는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잔혹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성산리 출신으로 건준 집행위원과 남로당 간부를 지냈던 현호경(玄好景, 37)은 1949년께 제주읍내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호경은 1947년 초에 이미 구금돼 육지형무소에서 복역 후 출감한 상태였다. 현호경의 여동생은 오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빠는 4·3발발 이전부터 이미 목포에 있었습니다만 사태가 악화된 후 경찰이 제주로 압송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주보육원장이던 숙모 탁명숙씨가 구명운동을 했어요. 숙모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이승만과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 하여 이 대통령이 제주에 오기만 하면 만날 정도였지요. 아무튼 숙모는 경찰서에 갇혀 있는 오빠를 면회해 ‘네가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다짐을 받았다.’며 사상전향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오빠는 ‘숙모님은 기독교 신앙이 깊은데 누가 그 신앙을 버리라고 하면 버리겠습니까. 난 내 뜻을 지키며 이대로 죽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조리(吾照里)
어로용 다이나마이트 빌미로 학살

48년 12월 29일, 성산면 오조리에 갑자기 비상사이렌이 울렸다. 해변마을인 오조리에서 사이렌 소리는 곧 토벌대의 집합명령이었다. 주민들은 늘 하던 대로 서둘러 공회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예전의 군인들이 아니었다.9연대와 교체한 2연대 군인들이었다. 그 중에는 낯이 익은 서북청년단원도 있었다. 군인들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줄 아는 20명 가량의 주민을 골라내 군주둔지인 성산포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들을 성산리의 한 창고에 가둬 모진 고문을 하다가 나흘만인 49년 1월 2일 일출봉 아래 속칭 ‘우뭇개’에서 학살했다. 이날의 희생자는 이장 高泰縱(47) 민보단장 洪聖江(45)을 비롯, 宋太立(65) 宋元辰(63) 김봉효(여,61) 宋仁杓(49) 吳昌禧(47) 吳萬斗(45) 洪平瀯(37) 康熙淑(35) 康官宣(33) 宋桃仙(여33) 송춘석(31) 宋致培(29) 吳永保(28) 高泰現(26) 宋均石(25) 玄瑞弘(20) 康斗先(19) 高淳奉(18) 등이다.


오조리에서 가장 큰 인명희생을 가져온 이 사건이 다이너마이트에서 비롯됐다하여 주민들은 이를 ‘다이너마이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혹은 당시의 표현대로 ‘던지기 약 사건’이라고도 한다.


다이너마이트는 무엇이며, 이것이 왜 학살극의 빌미가 됐는가. 주민들은 일본군이 패전해 돌아가면서 남기고 간 폭약‘다이너마이트’를 고기잡이에 이용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실수로 폭발해1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제주신보> 47년 5월24일자). 어장을 황폐화한다하여 경찰과 어업조합이 합동단속반을 편성해 적발에 나서기도 했다.


아무튼 4·3 전부터 다이너마이트를 고기잡이에 이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또 9연대 시절에는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경비용으로 허락했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이것이 문제가 됐는가. 주민 吳宗訓씨(69·성산읍 오조리)는 이렇게 증언했다.


“불법이긴 했지만 당시엔 고기잡이에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했습니다. 또 4·3이 발발한 후에는 민보단이 보초를 서는데 사용하라고 해서 초소마다 보관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 군인들이 한 주민을 끌고 와 주민을 집합시킨 후 다이너마이트 관리자를 끌고 갔습니다. 또 타 지역 출신으로 마을에서 멍석이나 짜며 지내던 불쌍한 노인은 제때 집합하지 않았다고 함께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9연대와 2연대가 교체될 때 이에 대한 인수인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주민은 설령 다이너마이트와 관련된 문제가 없었어도 결국엔 서북청년단 출신 군인들에게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서청이 앙심을 품고 있다가 무장하게 되니까 이를 빌미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한 유족은 4·19혁명 직후 국회의 진상규명 조사가 벌어지자 이렇게 신고했다.


“洪聖江. 나이 45세. 민보단장. 학살집행자는 2연대 특별중대장소위 김우희.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는다 해서 적개심을 품었고…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공비소탕용으로 사용허가를 받았으나 前부대가 이동하였기에 그 자는 군인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여 죄목을 부쳤음. 학살장소 성산포 우뭇개동산. 너무나 원통하니 원한을 풀어주시오” 그러나 곧이어 5·16쿠데타가 발생해 ‘원한’은 풀리지 않았다.


시흥리( 始興里)
손녀 겁탈 막던 할머니 총살

성산면 시흥리는 4·3 때 큰 희생을 모면했다. 마을에 입산자가 없었고 보초를 잘 섰기 때문이라고 한 주민은 말했다. 그렇다면 무장대의 지목습격을 받았을 터인데 그런 일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8∼9명의 사람이 4·3 기간 동안 희생됐다. 주민희생은 49년 초 2연대가 주둔하면서부터 시작됐다. 2연대 중에서도 성산포에 주둔한 군인들은 서북청년단 중심의‘특별중대’였다. 군복을 입었지만 일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계급장도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품갈취와 횡포를 부리며 토벌대 전위대 역할을 하던 극우청년단이 이번엔 진짜 무장을 한 채 나타난 것이다.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중 '우뭇개 학살'

특별중대는 성산국민학교(당시엔 ‘동국민학교’라 불렀다)에 주둔했다. 그리고 주정공장 창고를 수감처로 사용했다. 성산면은 물론 이웃한 구좌면과 표선면의 많은 주민들이 이 창고에 갇혔다가‘터진목’이나‘우뭇개’로 끌려가 학살됐다.


서청의 학살극은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도 잔혹해 차마 표현키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부성순(夫性順 19)은 축구선수였다. 면사무소에서는 미군 와이셔츠를 체육복으로 개조해 축구선수 11명에게 지급했다. 그런데 서청이 그 체육복을 탐냈다. 이를 거부했던 부성순은 후에 무장한 서청들에게 끌려나와 타살됐다.


夫甲生(41)은 그 즈음 군인들이 뿌린 삐라를 갖고 있다가 학살됐다. 그즈음 무장대의 귀순을 촉구하던 토벌대의 삐라였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부갑생은 이를 집안에 두었다가 발각돼 총살된 것이다.


1948년 말 이웃마을 오조리에서 벌어졌던 소위‘다이너마이트 사건’은 시흥리에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이 사건에 연루된 康昌洙(32)는 오조리 사람들이 희생된 지 일주일만인 49년 1월 9일 역시 총살됐다. 당시 시흥리 민보단장이었던 康仁玉옹(81·성산읍 시흥리)은 이 때 자신도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다이너마이트 사건에 부경유 이장 등 우리마을 사람도 11명이나 연루돼 성산리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습니다. 이들을 변호하러 그곳에 갔었습니다. 창고 안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감금돼 있었는데 오후 1시쯤 되니 연이어 학살터로 끌려가더군요. 내가 우리마을 사람들의 무고함을 말하니 책임자인 최 소위는 다짜고짜 내 오메가 시계를 빼앗고는‘포로 1명 추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김일성 비행기 태워주랴, 스탈린 비행기 태워주랴’하더니 날 거꾸로 매달아 각목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때 서청단원 고희준씨가 나타났어요. 고희준 씨는 서청 중에선 드물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는‘이 사람은 민보단장인데 이러면 제주사람 다 죽이게된다’며 말렸어요. 그랬더니 최 소위는 ‘지금은 계엄령 하인데 계엄령은 사람 죽이는 게 계엄령’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시흥리민 모두 석방되고 강창수 씨만 총살됐는데 단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줄 아는 기술자라는 게 희생 이유가 됐습니다.”


당시 60대 중반의 朴太秀할머니가 희생된 사연은 더욱 기막히다. 다시 강옹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할머니에게는 스무 살 가량의 오 아무개란 손녀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손녀를 데리고 성산포에 있는 딸의 집에 가서 살았지요. 그런데 그 손녀는 소문난 미인이었습니다. 서청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가 거절하자 오후 2시께 대로상에서 총살해 버렸습니다. 아무튼 서청은 터진목 등지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오죽했으면 터진목에서 보초 서던 순경조차 계속되는 학살극에 충격을 받아 입이 삐뚤어졌겠습니까. 그 순경은 심방을 데려다 굿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들에게 무장을 시켰는가.


고성리(古城里)
핏빛으로 물든 성산포 앞바다

1949년 1월 13일 성산포 ‘터진목’. 바다를 가르며 호리병의 목처럼 좁다랗게 이어진 그곳엔 겨울바람이 세찼다. 끌려온 고성리 젊은이들이 바닷가에 일렬로 세워지자 서북청년단의 총부리에서 요란한 총성이 터져나왔다.


이 때 정승원(鄭勝元, 39) 정성운(鄭性云, 38) 정희순(38) 홍경흥(洪敬興, 35) 정희선(鄭熙善, 33) 홍서철(洪瑞喆, 33) 고원평(高元平, 32) 김만길(金萬吉, 32) 오계욱(31) 정인호(鄭仁浩, 31) 홍성두(洪聖斗, 31) 정두준(鄭斗準, 30) 홍경효(洪京孝, 30) 정성보(鄭性寶, 28) 홍성순(洪聖淳, 28) 김철호(金喆浩, 26) 김경렴(金敬廉, 26) 김봉규(25) 박칠룡(朴七龍, 24) 김기삼(23) 이편수(22) 홍창수(22) 홍양순(21) 등 28명이 희생됐다.

성산면 고성리는 해변마을인 까닭에 중산간 위주로 벌어진 9연대의 초토화작전을 비교적 무사히 비껴 갔다. 그러나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연일 계속되는 학살극은 성산포의 바다와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였다.


1월 13일의 희생도 앞서 1월 9일 고성리 2구(현재의 신양리) 청년 조진생(趙辰生, 26) 김태생(金泰生, 25) 오만일(吳萬一, 20대) 한순만(韓順萬, 18) 등이 총살된 데 이어 나흘만에 또다시 벌어진 학살극이었다. 이즈음 터진목에서의 학살극을 목격했다는 한 증언자는 “모두들 혼이 나갔는지 살려 달라고 빌거나 우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사람은 목이 탔는지 짠 바닷물을 마시기도 했다.”면서 “시신이 바닷물에 쓸려 가기도 했고 목만 남아 뒹굴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이 날 고성리 청년들은 왜 끌려와 집단학살을 당했는가. 주민들은 청년들의 희생이 정기탁(鄭岐卓, 22)과 관련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정기탁은 4·3발발 전에 목포형무소에 보내졌다가 형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태가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집에 숨어 지내다 발각돼 총살됐다. 서청은 정기탁을 사살하는데 그치지 않고 고성리 주민들이 정기탁이 숨은 것을 알면서도 은닉했다고 트집을 잡아 총살한 것이다.

한편 그 무렵 성산리 주정공장 창고에서는 교사들도 대거 끌려와 고문을 받고 있었다. 동남국교(당시엔 성산서국민학교)의 등사판이 없어지자 ‘무장대의 삐라 제작을 위해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이들도 모진 고문을 받다가 고성리 청년들과 함께, 혹은 전후로 총살됐다.

고성리 출신으로 당시 교사였던 한 증언자는 “이 사건으로 동남국교에서는 김영택 교장(金榮澤, 33)을 비롯해 오달송(吳達淞, 32) 정맹존(鄭孟存, 22) 홍창수(22) 교사가, 성산국교에서는 정양심(鄭良深, 20) 김두옥(金斗玉, 20) 교사가 희생됐다.”며 “모두가 실력 있고 학생들의 신망이 두터운 훌륭한 분들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동남국교 교사였던 홍경토 씨도 이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홍씨는 자신이 목숨을 건지게 된 가슴아픈 사연을 어렵게 증언했다.

서청들은 이런 저런 구실을 댔지만 고성리 청년들이나 교사들 모두 무고하게 끌려간 것입니다. 엿장수나 하던 서청들이 무장을 하게 되면서부터 희생자가 속출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는데 내 옆에는 형(홍경흥)도 있었습니다. 총살장으로 끌려나가는 형의 발목을 한 번 만진 게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갇혔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때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성산국교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 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한달 만에 풀려 나와 보니 정 선생은 차아무개란 서청 간부와 결혼해 있었습니다. 날 살려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한편 고성2구(현재의 신양리) 주민들은 1949년 2월에 접어들면서부터 큰 희생을 치렀다. 소위 ‘도피자가족’으로 처형된 것이다. 김봉익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4·3발발 직전에 대부분의 청년들이 경찰에게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도 아무런 죄도 없이 제주경찰서에 끌려가 거꾸로 매달려 각목으로 맞거나 코에 물을 붓는 고문을 받다가 40일만에 풀려 나왔습니다. 이런 판이니 청년들은 육지나 일본으로 피신하기도 하고 일부는 산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 가족들은 ‘도피자가족’으로 총살되는 겁니다. 이종사촌 두명이 4·3직전에 일본으로 피신했는데 그 바람에 이모를 비롯해 외가 쪽의 희생이 컸습니다.


서북청년단 단장이었던 문봉제
2014년 광화문광장의 세월호리본을 상자에 담아 철거를 시도하는 서북청년단 재건위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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