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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에게 훈장을 주는 나라

임재성 변호사의 한겨레 칼럼-함께 하는 법(2025. 12. 19)

by 김양훈
2025년 12월 19일 자 한겨레신문 칼럼`
아래 글은 위 칼럼을 쓰게 된 이유와, 박진경 대령에 대한 서훈 배경 및 사후처리 방안에 대한 임재성 변호사의 설명입니다. (임재성 변호사의 페북에서 옮김)

이번텀 한겨레 칼럼. 제주4·3 강경진압을 주도했던 박진경 대령에 대한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썼습니다. 최근 정부가 박진경 대령에게 국가유공자 지위를 인정해서 논란이 컸죠.

논란이 된 국가유공자 증서

1. 왜 지금?

박진경은 부임 40여일만인 1948. 6. 18. 부하들에게 암살당합니다. 28살 나이였고, 자녀 없이 죽었습니다. 현재 ‘박진경 유족’이라고 말씀되는 분들은 양아들, 양손자입니다. 박진경에게 1950년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는데, 왜 75년이 지난 올해 10월에 갑자기 유족의 국가유공자신청이 있었던 걸까요?


제 분석은 이렇습니다.


가. ‘추모비 보호’를 위한 유족 측 움직임

1차적으로는 제주에 있는 ‘박진경 추모비’를 유족 측이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주에 1950년대 초반에 건립된 ‘박진경 대령의 추모비’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었고, 최근 그 양상이 더욱 치열했습니다. '학살자에 대한 추모비가 가당키나하냐'입니다. 유족 측은 국가유공자로 지정이 되면 이 추모비를 ‘지킬 수 있다’라고 판단한 듯 합니다.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제주에 세워진 박 대령 추도비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다. 유족들을 이를 막기 위해 박 대령을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보훈부에 신청했다고 한다. 박 대령이 국가유공자라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추모비가 현충 시설로 지정될 가능성이 생기는 만큼 훼손 등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 홍범도 지운 뉴라이트가 선택한 새로운 역사 전쟁 주인공

2차적으로는 뉴라이트 측에서 ‘박진경 대령’을 역사 전쟁의 새로운 소재로 선택해 수년 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칼럼에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윤석열을 등에 업고 홍범도를 지운 뉴라이트들이 이제는 박진경을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다. ‘4·3은 남로당 폭동’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작년 박진경 대령을 제목으로 한 단행본(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 그들은 왜 진실을 은폐했나?)을 출간했다. 이승만을 찬양하며 대박이 난 뉴라이트 영화 ‘건국전쟁’의 후속작 ‘건국전쟁2’가 올해 개봉했는데 주인공이 박진경 대령이다. ‘건국전쟁’ 감독 인터뷰다. “좌파는 항상 세력을 모으기 위해 악을 상징하는 희생양을 내세운다.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미 군정을 악마화하려 만들어낸 희생양이 박 대령이다.”>

칼럼에 담지 못한 건국전쟁 감독 인터뷰 내용입니다. “박 대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무장 세력과 싸우다 암살당했다. 그런데도 좌파에서는 박 대령이 제주 4·3 학살의 주범이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박 대령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번에 많이 울었다.”

올해 내내 제주에서는 박진경 대령 얼굴이 담긴 플랭카드가 여기저기 걸렸습니다.

2. 강경진압 증거가 없다? 새롭게 발견한 자료

앞서 언급한 건국전쟁 감독도 그렇고, 조선일보 등은 꽤 자신 있게 ‘박진경 대령이 강경진압이나 민간인학살을 지시하거나 주도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먼저, 재임 40여일 동안 수천명(기록에 따라 3천명부터 6천명까지)이 체포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박진경 부활론자들은 당시 박진경 대령 휘하에 있던 채명신의 진술을 근거로 ‘대규모 체포는 입산한 주민들을 무장대와 분리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대규모 체포는 민간인 보호 작전이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채명신은 심지어 나중에 본인이 베트남에서 내세운 ‘100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가 박진경 대령에게 배운 것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럴까요? 칼럼의 반론입니다. <그 진술을 믿기에는 반대 정황이 뚜렷하다. 박 대령은 연대장에 취임하며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강경 진압을 공언했다는 것은 복수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박진경이 지시한 대규모 체포 작전에 대해 미 군정은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버리는 작전’이라 명명했다. 민간인 보호가 아니라 민간인 학살의 전 단계였다.> 만약 박진경 연대장이 채명신 주장과 같은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면 단기간에 무차별적인 수천명 구금으로 이글거렸던 제주도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적극 작전의 취지 등을 공표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표는 전혀 없습니다. 온건파 김익렬 연대장 갑자기 날리고 박진경을 부임시킨 당시 미군정의 분위기까지 종합하면 채명신의 진술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반대로 박 대령이 강경진압을 명령했고, 그 결과 민간인 피해가 많았다는 증언은 많습니다. 박진경은 부임 40여일만인 1948. 6. 18. 부하들에게 암살당합니다. 연대장이 하급자들에게 살해된 엄청난 사건이었고, 사건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서울로 이송되어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언론 취재도 꽤 이루어졌지요. 이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의 강경진압 지시, 이로 인해 발생했던 민간인 피해(살인포함)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진술하였습니다. 상관을 죽일 수 밖에 없었떤 이유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활론자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라고 부정합니다. 암살자들이 법정에서 본인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거고, 이들은 남로당 세포였다고 주장합니다. 진술신빙성 문제인데, 부활논자들 주장을 깰 논리야 많지만 일단 그냥 넘어가봅시다.

저는 ‘임부택 장교 증언’이면 부활론자들 논거는 꽤 많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위 법정에서는 피고인들만 증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 대령의 참모였던 임부택 대위도 증언을 합니다. 그는 암살가담자가 아님은 물론 한국전쟁 시기 상당한 전과를 올려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2차례나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근무했던 육군 11사단에는 2018년 ‘임부택 장군실’이라는 회의실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한국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은 부활론자들이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1948. 8. 12. 오전 고등군법회의에 출석하여 박진경이 ① ‘조선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다, ② 부락을 수색하여 도피하는 자에 대해서 3회 정지명령에 불응자는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③ 정지명령에 불응한다고 총살당한 부락민이 임부택 장교 본인의 기억에 남은 것만으로도 20~30명은 넘는다고도 말했습니다(1948년 8월 18일자 조선일보). 20명 이상 총살을 임부택이 직접 봤다는 부분은 정부 공식 보고서 등 기존 문헌에는 없는 부분으로 본 칼럼을 준비하며 새롭게 확인된 것입니다.

① 무장여부, 적대행위 여부 상관없이 3회 정지명령에 불응하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⑵ 그래서 한 장교가 직접 목격한 총살만 20회가 넘는다면, 그 명령을 발한 연대장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정지명령에 불응하면 체포하면 됩니다. 군인들이 부락을 수색하면서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이며 돌아다녔습니다. 6주 동안 5천명 전후의 사람들을 체포했습니다.

언론 등에서는 박진경 대령에게 ’강경진압 주도자‘라고 표현을 많이 합니다. 1948. 10.부터 본격화된 학살 이전에 부임해 짧은 기간 임기만을 수행했기에 ’학살‘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나는 고민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전쟁범죄에 천착해온 법률가로서 볼 때 ’무장여부 적대행위 여부와 상관없이 3회 정지요구 불응시 발포‘라는 명령을 발했고, 그 명령에 따라 최소 수십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면, 학살자라는 표현은 과하지 않습니다.

고민 속에 칼럼 제목을 “학살자에게 훈장을 주는 나라는 없다”로 한 이유입니다.

3. 그럼 어떻게?

국가유공자법은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에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해두었는데, 법원은 이 조항을 넓게 해석합니다. 거짓뿐만 아니라 친일 행적과 같이 공적에 반하는 다른 행적이 사후에 밝혀질 때도 취소할 수 있다고 보는거죠. 1948. 6.에 죽은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4·3 당시 연대장으로서 작전수행을 한 것이 공적의 전부일 것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강경진압, 학살명령 등으로 충분히 취소는 가능해보입니다.

필요한 입법을 할 수도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법은 ‘상훈 박탈’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오로지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은 취소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4·3특별법에는 이런 조항이 없는데, 여러 단체에서 이 입법 필요성을 꾸준하게 제기해왔습니다. 신설하는 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뒤늦은 일입니다.

박진경에 대한 논쟁은 이번 국가유공자 사건에 그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뉴라이트의 차세대 영웅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입니다. 논쟁이야 얼마든지지만, 그 과정에서 4·3의 고통이 또 다시 증폭될까 걱정입니다.

지난 15일 박진경 대령의 추모비 옆에 제주4·3의 진실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다.
김익렬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맨 오른쪽)은 1948년 6월 18일 새벽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故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 제주 주둔 미군고문관 출신 웨슬로스키 소장
1948.5.5 최고수뇌회의 참석차 제주에 온 수뇌부들. 좌측에서 두번째 군정장관 딘 소장,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병옥 경무부장, 맨 오른쪽이 김익렬 연대장. ⓒ 미국립문서기록관리
제주 4·3사건 당시 작전회의 중인 경비대 장교들 ©nara
문상길 중위-제주 주둔 9연대 아랫줄 오른편 끝, 맨 왼쪽이 이세호 대위, 두사람 건너 김익령 대령, 심흥선 대위, 문상길 중위
박진경을 암살 주모자 문상길 중위 총살 기사-호남신문-1948년 9월25일자 2면
호남신문이 4.3 당시 제주를 현장 취재한 후 보도한 르포 기사 '동란의 제주도를 찾아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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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6일자 한라일보 칼럼
[6·18의거와 기억의 책임]
1948년 4월 3일의 무장대 봉기 이후 엄중한 시국의 연속이었던 제주 섬, 6월 18일 갓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문상길 중위와 여덟 명의 부하들이 진급 축하주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하였다. 손선호 하사가 쏜 두 발의 총알이 머리와 심장을 관통했다. 목숨을 건 거사의 목적은 민족반역자 처단이었다.
거사 후 석 달이 지나, 6·18의거를 주도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총살형 집행은 1948년 9월 23일 오후 3시, 수색의 망월산 기슭에서 있었다.
아직 형장의 위치는 분명치 않고, 무덤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뿐이 아니다. 두 사람에 관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6·18의거에 대한 진실 왜곡이나 사실 날조뿐이 아니다. 누군가 기억의 단초들을 없애버렸음이 역력하다. 또 한편 제주 민중을 살리기 위한 의거였음에도 어찌하여 제주 4·3평화공원에는 그들의 뜻을 기리는 기념물 하나 없는 것일까?
문상길의 고향 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72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안상학 시인의 <기와 까치구멍집>이란 시를 통해서다.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안동의 이식골은 임동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낙동강 지류 대곡천의 동쪽 양지마에 있다. 대곡천을 사이에 두고 동향한 마을은 양지마, 서향한 마을은 음지마라고 불렀는데, 양지마을 음지마을이란 뜻이다. 마령리는 조선 중종 때 뿌리를 내린 남평문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 후 종손은 종택을 남겨두고 이상룡 일가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의 성지 만주로 떠났다.
이에 비해 박진경은 경남 남해군에서 친일단체의 간부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달삼과 맺은 4·28평화협정을 실행하려다 온갖 방해공작으로 실패한 김익렬 연대장의 후임으로 부임한다. 연대장 취임식에서 자기 부친은 일제의 '대정익찬회'의 중요 간부였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그는 독립을 방해하는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다. 양민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 없고, 딘 미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9월 23일 오후 3시, 사형일 그날 그 시각에 맞추어 수색의 망월산 기슭에 제주 사람들이 모였다. 문상길과 손선호 하사의 영혼을 위로하고 6·18의거를 기리는 세 번째 진혼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주최는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주통일청년회,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였다.
6·18의거를 결행한 의사들의 희생에 이어서 뒤에 남은 친가족들은 남모르는 박해를 받았다. 너무 늦었지만 그들의 의거를 기리는 진혼제를 올리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이날 참석자들은 망월산 기슭에 6·18의거를 기리는 추모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소망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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