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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약혼자>

자기 삶을 선택한 주인공 '나댜'의 이야기

by 김양훈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갈 것인가

안톤 체호프의 마지막 단편소설 〈약혼자〉(1903)는 그의 문학 세계를 집약하는 동시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젖히는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여성이 결혼을 거부하고 자립의 길을 선택하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사회가 낡은 질서를 벗어나려는 문턱에서 겪는 긴장, 그리고 개인의 내적 각성이 역사적 전환과 맞닿을 수 있음을 드러내는 문학적 선언이기도 하다.

주인공 나댜는 사회적 안정이 보장된 혼인을 앞두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그녀의 약혼자는 성실하지만 무미건조하고, 그와의 결합은 안정된 미래를 약속하는 듯 보이나 동시에 영혼을 갉아먹는 속박으로 다가온다. 체호프는 결혼 제도를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여성을 사회적 안락 속에 가두는 장치로 묘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약혼자〉는 체호프가 오랫동안 집요하게 탐구해 온 주제인 '인간을 구속하는 제도와 관습의 힘'과 맞닿는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나댜의 태도다. 이전 체호프의 인물들이 대개 무력과 체념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것과 달리, 그녀는 결단을 내린다. 지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촌 사샤와의 대화를 통해, 삶의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사샤는 공부와 자기 계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길을 제시하며 나댜를 일깨운다. 결국 그녀는 가족의 반대와 사회적 시선을 무릅쓰고, 결혼을 거부한 채 도시로 떠난다. 체호프 문학에서 보기 드문 이 능동적 탈출은 작품을 희망의 서사로 이끌어 간다.

〈약혼자〉는 이야기 그 자체로 여성의 자각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19세기말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은 가정과 결혼을 통해만 존재를 인정받았지만, 나댜는 그 규범을 거부하고 자기 삶을 선택한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반항을 넘어, 새로운 사회적 가치의 서막을 예고한다. 나댜의 출발은 아직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그 불확실성 자체가 자유의 본질이자 인간의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된다.

또한 이 작품은 체호프 문학의 궤적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다. 체호프는 일관되게 인간의 무력함, 그에 따른 무기력한 일상,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을 그려 왔다. 〈세 자매〉의 “모스크바로 가야 해”라는 갈망이 끝내 실현되지 못한 것처럼, 체호프의 인물들은 대개 정체와 체념 속에서 소멸한다. 그러나 〈약혼자〉에서만큼은 주인공 나댜가 직접 행동을 선택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이는 체호프가 말년에 이르러 러시아 사회에 대한 근본적 희망을 여전히 놓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약혼자〉는 체호프 문학의 절정이자 종착점에서 울려 퍼진 해방의 선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안락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서는 나댜의 결단은, 한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전환의 상징이다. 체호프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은 숙명적 무기력에만 갇힌 존재가 아니라, 자기 선택을 통해 삶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약혼자〉는 체호프 문학 전체를 새로운 빛으로 비추는 작품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인 “나는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갈 것인가”를 우리에게 던진다.

Tolstoï, Gorki, Tche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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