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구엄리 옛이야기-4화
수신영약(修身靈藥)
1
양 포수의 긴 한숨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축년 난리가 무엇 때문이냐를 두고 말싸움이 붙을 차례였다. 주된 봉기 원인이 세폐냐 교폐 때문이냐는 늘 논쟁거리였다. 석출은 교폐가 주된 원인이고 그중에서도 김원영 신부가 만든 <수신영약>이란 것이 아주 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 것은 그가 조무빈 훈장 집을 찾은 어느 날 그 필사본의 주된 내용을 베껴서 꼼꼼하게 읽어 본 후였다. 그저 이런 논쟁의 물꼬가 어느 틈에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형수였다. 무슨 낌새가 보였는지 형수가 쳇방에서 나와 고팡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손님 밥상에 술 한 잔 없으면 되냐면서 형수가 고팡 술 항아리에서 오메기 탁주를 사발로 떠 왔다. 눈치 빠른 석출은 바삐 길을 나서야 한다며 오메기술 사발을 후딱 비우고 낭간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장탉과 암탉 두 마리가 부리를 쪼아대며 지네 한 마리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소금 대신 바꾼 콩을 담은 멕은 형님 집에 맡기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쇠질메에 실어갈 생각이다. 그는 누렁쇠 고삐를 쥐고 광령마을을 향해 길을 나섰다. 항파두리성(缸坡頭里城) 서쪽 냇창길을 느릿느릿 지나며 성 위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외성 둑이 무너지고 시든 잡초 줄기가 무성했다. 뭉게구름이 굴묵 연기 토하듯 피어올랐다. 삼별초난에 엄쟁이 사람들도 김통정 군사에 끌려와 고픈 배를 움켜쥐며 외성 흙을 나르고 내성의 돌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2
구름을 바라보며 걷던 김초시는 형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수는 집 마당을 나서는 그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동서 아시가 여태 손(孫)이 없으니 걱정이 많겠네.”
그는 답을 피하듯 퉁명스러웠다.
“차츰 생기겠지요, 뭐”
“엄쟁이 종가 넹겨 받았는데 동서가 해 넘기면 또...”
형수는 석출의 무심한 안색을 살피더니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그는 숲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걸었다. 뻣뻣하게 늘어진 멍개낭 가지에 이파리는 다 지고 연지곤지 열매들만 방울방울 달렸다. 가을이 깊어진 것이다. 숲길 옆으로 틀낭이 틈틈이 보였다. 그는 쇠고삐를 소낭 가지에 아무렇게나 매어두고 틀낭을 올랐다. 떨어지다 남은 틀은 익을 대로 익어 불그레했다. 숲 안쪽으로 으름덩굴이 보였다. 석출은 틀나무를 내려와 어느새 으름덩굴을 헤집고 있었다. 한껏 익은 으름들은 속이 터진 채 농염했다. 속이 맘껏 벌어진 으름 모양을 보노라니 동네 어른들의 수수께끼를 엿듣던 어릴 때가 생각났다. “아으 땐 조쟁이 되곡 어른 되믄 보뎅이 되는 건 뭣고?” 여름날 어스름 저녁 몰방에 모여 앉아 이렇게 누가 농짓거리로 물으면 “임하부인 아니라게”. 그러면서 매번 나무 아래 임하(林下) 부인 거시기! 이러고 토를 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킥킥대며 흐흐흐 이상하게 웃는 모양을 쳐다보며 호호 따라 웃었다.
나무 수풀 아래 여인(林下婦人)이 무엇인지는 한참 커서 맹자왈 공자왈 할 적에야 알았다. 음탕한 그 뜻을 알고는 어린 속마음이 혼자 부끄러웠었다. 석출은 돌코름헌 맛에다 그 모양새를 쳐다보며 혼자 실그렝이 웃었다. 젊은 아내의 벗은 아랫도리를 실감한 터라 그는 '아멩 보아도 닮긴 담았어'하는 생각을 했다. 숲 그늘에 서서 그는 남몰래 괜히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숲을 빠져 나오니 고성천이 보였다. 보리씨를 뿌린 빈 밭들이 잣담에 싸여 옹기종기하다. 구렁이 기어가듯 좁은 농로는 꾸불꾸불 냇가를 따라 이어졌다. 얼마 못 가 승조당을 지난다. 곧 청화마을이고 이어진 광령마을이 멀지 않았다. 갈 길 바쁜 석출의 마음을 알아챈 듯이 바쁜 걸음을 걷는 누렁쇠를 바라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짐승도 나름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그 「수신영약」이란 고약한 이름에 생각이 닿자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다.
3
조무빈 훈장이 국한문 혼용으로 된 글을 언문으로 고쳐 적었다며 석출에게 건넨 책자의 표지는 「수신영약」이었다. “아전인수니 견강부회니 하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민란의 소동은 딱 이 때문이야!” 조무빈 훈장은 힘주어 그렇게 한마디 했다. 제주의 민중을 발아래로 보며 그들이 이제껏 꾸려온 살림살이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천주교 가르침만 옳다는 이 소책자의 저자는 김원영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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