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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섬>으로 떠난 체호프

그는 왜 사할린 섬으로 가야 했을까?

by 김양훈
사할린은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진실이자,
그러나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진실이다.

안톤 체호프의 1890년 사할린 여행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역설적인 사건이다. 그는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의사들은 그에게 무리한 장거리 여행은 치명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1주간의 기나긴 여정을 감행해 험난한 극동의 유배지 사할린에 도착했다. 체호프의 사할린행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모험심의 발로가 아니라, 작가로서의 자기 인식과 문학적 소명을 알린 여행이었다. 문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여행은 체호프가 종종 “사회의 모순에 무심하다” 혹은 “개인의 심리 묘사에만 집착한다”는 비평가들의 평가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체호프는 자신의 작품에서 노골적인 사회 비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적 이상이나 정치적 선동 대신, 일상 속에 스며든 인간의 고독, 무력감, 희망의 미세한 흔적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당시 러시아의 비평가들, 특히 민중주의적 성향의 평론가들은 체호프가 사회적 현실에 대해 침묵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문학의 역할을 “증언”이 아니라 “진실의 기록”으로 이해했다. 그는 편지에서 “사할린은 러시아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다. 작가가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인식은 사할린 여행으로 구체화되었다.

사할린은 제국 러시아의 가장 극악한 모순이 집약된 장소였다. 죄수와 유배인, 그리고 그 가족들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생존하고 있었다. 체호프는 이 실태를 단순히 문학적 상상으로 채워 넣기를 거부했다. 그는 의사로서의 훈련을 발휘해 통계조사를 실시하고, 주민과 죄수 약 10,000명을 직접 면담했다. 《사할린 섬》의 첫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사할린은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진실이자, 그러나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진실이다.” 이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사회적 보고서이자 문학적 고발장이었다.

이 여행은 그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지만, 문학사적으로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첫째, 체호프는 사회문제에 침묵한다는 기존 비판을 몸소 뒤엎었다. 그는 직접 현장을 찾아가, 가장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함으로써 작가의 사회적 책무를 행동으로 증명했다. 둘째, 그는 문학적 재현과 학문적 조사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사실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한 그의 태도는 이후 다큐멘터리 문학이나 사회참여적 글쓰기에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따라서 체호프의 사할린 여행은 단순히 한 병든 작가의 무모한 모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쟁 속에서 체호프가 내놓은 가장 실질적인 대답이었다. 그는 문학을 통한 선동 대신, 사실을 통한 고발을 선택했다. 체호프가 남긴 《사할린 섬》은 차가운 통계와 담담한 묘사 속에서 오히려 더 강력한 사회적 울림을 전한다. 이 점에서 사할린 여행은 그의 작품 세계가 개인적 내면 탐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러시아 제국의 부조리를 기록하는 증언의 차원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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