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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흔(子欣)의 이야기

한강의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 을 읽고서

by 김양훈
제가 살아본 도시들 중에는 서울이 제일 정머리 없어요.
긴 이야기를 마친 자흔은 지독한 여독에 찌들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뇌까렸다.
…오래 못 있을 것 같아요.
자흔의 마지막 독백을 들으며 나는 어렴풋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미래는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 젊은 그녀에게서 미래를 지워내 버린 것인지, 아무런 희망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자흔이 지쳤다는 것, 이십몇 년이 아니라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을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다.
이를테면 자흔과 나란히 앉아서 아홉 시 뉴스를 볼 때면 나는 언제나 나도 모르게 한 마디씩 ‘개자식들!’ ‘이 미친놈들!’이라고 내뱉곤 했는데, 그때마다 자흔은 키득키득 웃으며 즉흥적인 곡조를 흥얼거렸다. 개자식들, 개자식들, 개자식들…… 자흔은 내가 방금 뱉은 욕지거리가 아름다운 가사인 양 세면장과 방을 들락날락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그녀가 나를 놀리려 한다고 생각될 만큼 끈질기게 계속되곤 해서, 한 번은 참다못해 ‘그만해 둬요’라고 말하려고 자흔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자흔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 얼굴에는 견고한 평화가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개자식들, 나쁜 놈들, 더러운 놈들…… 따위의 가사에 붙여진 곡조는 어린아이를 잠재우는 자장가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때 나는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인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사람인지, 이 사람을 비난해야 하는 것인지 어쩐 지를 알 수 없어 망연히 자흔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31쪽)
한강의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에서 주인공 자흔은 ‘지독한 여독에 찌든 얼굴’을 한 채 “서울이 제일 정머리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자흔이라는 인물이 지닌 삶의 피로와 소외 심리를 드러내는 푸념이다. 그녀가 느끼는 ‘정머리 없음’은 대도시가 갖는 익명성의 쓸쓸함과 인간관계의 단절,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고독에 대한 체념이 아닐까. 서울은 자흔에게 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주는 희망의 공간이 아니라, 미래를 지워버리는 비정한 현재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화자(話者)인 나는 자흔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미래는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그녀가 그저 절망만하거나 패배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속적 희망과 욕망의 체계를 넘어선 인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자흔의 ‘미래 없음’은 절망이 아니라 덧없는 희망을 초월한 수도자가 가짐직한 삶에 대한 수용의 태도는 아닐까.

그녀는 “이십몇 년이 아니라 천 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었다.”

이 표현은 자흔의 시간 감각을 인간적 차원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한강은 이러한 과장된 표현을 통해 인간의 고통이 단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전체의 피로임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자흔의 얼굴에 때때로 떠오르는 무구하고 빛나는 웃음이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그 웃음은, 절망의 반대편에서 피어나는 조용한 긍정이다. 자흔은 세상의 부조리에 반항하지도, 그것을 개혁하려 들지도 않는다. 대신 그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아이처럼 천진한 방식으로 세상을 노래한다.

화자가 뉴스를 보며 “개자식들!”이라고 분노할 때, 자흔은 그 욕설을 곡조로 바꿔 흥얼거린다.

그녀의 노래는 냉소나 풍자를 넘어 절망을 통과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초월자의 평화스러운 태도견지한다. 마치 20세기 러시아 문학에 등장하는 '유로지비'처럼.

절망 속의 긍정,
무력함 속의 품위?

욕설이 자장가로 변하는 장면은 변태적 구토 정서의 정점을 이룬다. 자흔의 노래 속에는 비참함에 대한 연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체념 섞인 의지가 함께 깃들어 있다. “개자식들”이라는 단어는 더러운 세계에 대한 욕지거리지만, 그것을 부드러운 멜로디로 감싸는 순간, 자흔은 그 부조리마저 포용한다. 이러한 자흔의 행동은 도덕과 윤리가 파괴된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상을 말하고 있는가?

구토와 부조리

화자가 자흔을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체험한 세상은 이미 상처와 분노의 언어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작가 한강은 자흔을 통해 인간이 세계의 잔혹함 속에서도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한다. 자흔이 생각하는 ‘정머리 없음’은 인간적 따뜻함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상처를 겪은 끝에 도달한 감정의 무중력 상태임을 말한다. 그래서 바보 같아 보이는 그녀의 헛헛한 웃음은 세상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고통을 포용하려는 태도는 아닐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을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이 대목은 한강 문학이 일관되게 탐구해 온 주제인 상처 입은 사람의 마지막 남은 품위와 절망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응축된 표현으로 보인다. 자흔의 구도(求道) 같은 삶의 태도는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무력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삶의 불꽃을 보여준다.

맥락 없어 보이는 자흔의 흥얼거림은 우리 시대의 피곤함을 달래는 자장가다. 이는 소시민이 세상의 부조리를 견디는 방식으로 제시한, 작가 나름의 소심한 ‘사랑의 전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면 자흔이 다가와 '흥!'하고 코웃음 칠지 모르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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