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거리, 가로등, 약국

By 알렉산드르 블로크

by 김양훈

밤, 거리, 가로등, 약국

알렉산드르 블로크


밤, 거리, 가로등, 약국

무의미한 흐릿한 빛

스무 해를 더 산들

다 그렇겠지, 출구는 없다.


죽어 다시 산들 어차피

다 예전처럼 되풀이되겠지

밤, 얼어붙은 운하의 잔 물결,

약국, 거리, 가로등. (1912)


5월 독서과제 시선집 연재 (20)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이 짧고도 강렬한 시는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정점으로 꼽힙니다. 1912년에 쓰인 이 작품은 마치 정지된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차갑고도 허무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과 시평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작품의 배경:

세기말의 고독과 정체

• 시대적 배경: 1912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터지기 직전, 제정 러시아가 서서히 몰락해 가던 불안하지만 평온한 시기였습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깊은 허무주의와 비관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 공간적 배경: 시의 무대는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입니다. "얼어붙은 운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북구의 차가운 도시 분위기가 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 문학적 위치: 블로크의 연작시인 <죽음의 무도(Dances of Death)> 중 하나로, 삶의 무의미함과 반복되는 굴레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 시평:

닫힌 원의 미학, 그리고 영원한 회귀

완벽한 순환 구조 (The Vicious Circle)

이 시의 가장 놀라운 점은 '수미상관(首尾相關)'의 극치라는 점입니다. 첫 행에서 "밤, 거리, 가로등, 약국"으로 시작한 시는 마지막 행에서 다시 "약국, 거리, 가로등"으로 끝납니다. 이는 독자에게 빠져나갈 길 없는 ‘폐쇄공포증’ 같은 순환을 보여줍니다. 삶이 끝나고 죽음이 찾아와도, 혹은 20년이 지나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영겁회귀'의 절망을 구조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무의미한 빛과 차가운 물질성

"무의미한 흐릿한 빛"은 가로등의 물리적 빛을 넘어, 구원도 희망도 없는 당대 지식인의 정신 상태를 투영합니다. 약국은 치유의 장소라기보다는 독약이나 자살, 혹은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나는 임종의 대기실 같은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시인은 감정을 배제한 채 사물(밤, 거리, 가로등, 약국)만을 나열함으로써, 인간의 존재가 한낱 도시의 부속품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얼어붙은 시간의 풍경화

"얼어붙은 운하의 잔물결"이라는 표현은 역설적입니다. 움직여야 할 물결이 얼어붙었다는 것은 시간이 정지했음을 의미합니다. 블로크는 이 시를 통해 '변하지 않는 절망'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구는 없다"라는 단정적인 선언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막막함을 대변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단 네 개의 단어
아름다운 인생의 허무
블로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항상 ‘길’이란 형상 속에서 찾았다. 그에게 창작은 시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의 반영'이다. 그래서 그는 서로 다른 시기에 쓴 시와 서사시들을 독자적인 정신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의 모든 작품은 단일한 예술적 총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