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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와 <바냐 아저씨>

드미트리 필로소포프, 안드레이 벨리, 미하일 게르셰존의 시각으로 본 비평

by 김양훈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와 《바냐 아저씨》는 19세기말 러시아 사회의 정체와 인간 내면의 무력감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러시아 문단의 여러 평론가들 가운데 특히 드미트리 필로소포프(Dmitry V. Filosofov)와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 그리고 미하일 게르셰존(Mikhail Gershenzon)은 이 작품들에 대하여 인상적인 비평을 남겼다. 이들은 체호프를 단순한 사실주의 작가로만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대의 러시아를 진단한 “정신 병리학자”로 이해했다. 특히 필로소포프의 평론은 그중에서도 가장 내면적이고, 종교적 색채를 띤 윤리적인 해석으로 평가된다.

필로소포프는 체호프의 인물을 “행동 불능의 시대정신을 보여준 영혼들”로 규정했다. 《바냐 아저씨》의 바냐와 소냐, 그리고 《세 자매》의 이리나와 마샤는 모두 도덕적 진지함을 지니고 있으나, 그 진지함이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불임의 윤리’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필로소포프는 이를 “러시아 지식인의 병”이라 불렀다. 그들의 마음속에 이상은 있으나, 그 이상은 사상으로만 존재하고 행동으로는 이행되지 않는다. 그는 체호프의 인물들을 ‘성스러움의 잔향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들’로 묘사하며, 체호프의 연극은 현실 개혁의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이 신 없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실존적 실험이라고 보았다.

특히 《세 자매》에 대해 필로소포프는 “러시아적인 그리움의 교향곡”이라 평했다.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싶다는 세 자매의 반복되는 열망은 단순한 공간적 이동의 욕망이 아니라 “잃어버린 정신의 중심”을 되찾고자 하는 은유적 표현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그 중심이 이미 존재하지 않음을 냉정히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끝없이 지연되고 그들 곁에서 멀어져 간다. “우리는 살아야 해요, 일해야 해요.”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들이 못다 한 윤리적인 결단처럼 들리지만, 필로소포프에게 그것은 ‘내일로 유예한 신앙’에 불과하다.

《바냐 아저씨》에 대한 그의 평은 더 철학적이다. 그는 바냐를 “잃어버린 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절규하는 인간”이라 불렀다. 바냐의 분노와 자책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신이 사라진 시대의 도덕적 혼란에 대한 외침이다. 필로소포프는 체호프가 ‘부조리’를 감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 부조리를 ‘침묵과 정적의 미학’ 속에 녹여낸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체호프의 무대는 격정이 아니라 정적의 신학이다”라고 썼다. 인간은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하지만, 체호프는 그 절망 속에서 인간적인 선의 잔영을 포착한다. 소냐의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라는 대사는 그 절망의 심연 위에서 희미하게 남은 구원의 그림자이다.

다른 러시아 비평가들의 시선도 흥미롭다. 안드레이 벨리는 체호프의 희곡을 “죽어버린 시간에 대한 시”라 불렀다. 그의 관점에서 《세 자매》는 사건 없는 드라마, 즉 사건의 부재 자체가 사건이 되는 구조다. 인물들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무력하게 진동할 뿐 현재를 창조하지 못한다. 벨리는 이러한 체호프의 시간의식이 러시아 상징주의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고 보았다.

미하일 게르셰존은 체호프의 세계를 ‘윤리적 진공 상태’로 묘사했다. 그는 체호프의 인물들이 도덕적 판단의 주체이기를 포기한 채, 단지 고통을 감내하는 수동적 존재가 된 점을 비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수동성 속에 체호프 특유의 ‘무력한 성스러움’을 보았다.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조차, 그 무력함 속에는 죄와 속죄를 의식하는 인간적 깊이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후기 상징주의자 블로크는 체호프를 “러시아 영혼의 마지막 리얼리스트”라 불렀다. 그에게 체호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신학적 광기를 버리고, 대신 침묵과 일상의 리듬 속에서 인간의 고통을 응시했다. 블로크는 《세 자매》의 마지막 합창을 “비극 이후의 기도”라 명명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도, 체호프의 인물들은 여전히 ‘삶을 믿으려는 자들’이다.

이처럼 필로소포프를 비롯한 러시아 비평가들은 체호프를 단순한 현실주의 작가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러시아 정신사의 전환기에 선 윤리적 탐구자였다.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는 행동의 부재를 그린 연극이 아니라, 의미를 잃은 시대 속에서 ‘의미를 붙잡으려는 인간’의 내면적 몸부림을 보여주는 실존극이다. 필로소포프가 말한 대로, 체호프의 인물들은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희망임을 고백하는 증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러시아 영혼의 간직한 깊은 회한과 기도를 듣게 된다.


드미트리 블라디미로비치 필로소포프(Dmitry Vladimirovich Filosofov, 1872–1940)는 러시아 문학비평사에서 보기 드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평론가일 뿐 아니라, 문학과 종교, 예술과 사회적 윤리의 교차점에 서 있던 사상가이자, 러시아 근대 문학의 도덕적 심층을 탐사한 철학자였다. 그의 글은 ‘분석’이라기보다 ‘성찰’에 가깝고, 문학을 단순한 미적 표현의 장이 아닌 영혼의 탐구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는 체호프나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작가들의 내면적 세계와 근본적으로 호응하는 인물이었다.

필로소포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귀족적 교양 속에서 성장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문학과 철학, 종교문제에 몰두하였다. 특히 친구였던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 그리고 철학자 바실리 로자노프와 함께 ‘신종교운동(новое религиозное сознание)’을 주도하며, 러시아 지성계의 종교적·미학적 변화를 이끈 인물이다. 그들은 문학을 단지 언어의 예술이 아니라 인간 구원의 실험장으로 여겼고, 그 안에서 러시아 정신의 재탄생을 모색했다. 이러한 지적 환경 속에서 필로소포프의 비평은 언제나 인간의 ‘도덕적 의식’과 ‘내면적 진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문학비평에서 체호프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필로소포프에게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이 현실을 넘어 ‘윤리적 현실’을 포착한 최초의 작가였다. 그는 체호프가 외견상 무기력하고 침묵하는 인물들을 통해, 사실상 가장 절망적인 인간 조건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그 시대의 영혼’을 보여주었다고 보았다. 『세 자매』나 『바냐 아저씨』에서 필로소포프가 주목한 것은 플롯이나 사건의 진행이 아니라, 그 안에 배어 있는 도덕적 정조(情調)였다. 그는 이 두 작품에서 체호프가 “비극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절망을 미화하지 않는” 윤리적 절제의 미학을 완성했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바냐 아저씨』의 주인공 이바노프나 바냐가 삶의 무의미를 절규할 때, 필로소포프는 거기서 러시아 지식인의 도덕적 위기를 읽어냈다. 그는 체호프의 인물들이 단지 ‘패배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시대의 양심이라고 보았다. 『세 자매』의 이리나와 마샤, 올가는 그 자체로 ‘지성의 잔향’을 품은 존재들이며, 그들의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의미를 잃은 세계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의 노래”로 해석한다. 필로소포프는 이 점에서 체호프를 “러시아의 가장 냉철한 예언자”라 불렀다. 그는 체호프의 문학을 “냉소적 허무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윤리적 감수성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로 읽었다.

필로소포프의 체호프 비평은 종종 메레시콥스키의 종교적 상징주의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로자노프의 신비주의보다 훨씬 도덕적이다. 그는 체호프의 문학에서 ‘신 없는 인간의 성스러움’을 발견했다. 신이 침묵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이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려는 그 순간, 문학은 종교의 대체물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비평의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었다.

결국 필로소포프는 문학을 통해 ‘삶의 구원 가능성’을 탐색한 마지막 러시아 낭만주의자이자, 초기 실존주의적 감수성을 문학비평 속에 도입한 선구자였다. 그에게 체호프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도덕적 침묵을 드러내 보인 ‘영혼의 해부자’였다. 이 점에서 그의 체호프 해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것은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드미트리 필로소포프의 비평 세계는 체호프의 미학과 함께 읽을 때 가장 깊은 빛을 발한다. 그는 예술과 신앙, 그리고 윤리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문학을 인간 정신의 내면적 고백으로 승화시킨 비평가였다. 그의 체호프 해석은 러시아 문학이 지닌 도덕적 심층을 드러내는 동시에, ‘진실한 삶’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문학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필로소포프에게 그것은, 인간이 자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안드레이 벨리(Андрей Белый, 본명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부가예프, 1880–1934)는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가장 복잡하고도 내면적인 얼굴이었다. 그에게 문학은 단순한 예술의 언어가 아니라, 영혼의 음향(音響)과 우주의 리듬이 교차하는 초월적 장(場)이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과 사유는 러시아 상징주의의 미학적 정점을 이루는 동시에, 그 몰락의 예감을 안고 태어난 정신적 드라마이기도 하다.

벨리는 수학자였던 아버지 니콜라이 부가예프의 엄격한 합리주의 아래 성장했지만, 청년기에는 그 합리성의 그림자를 찢고 나아가려는 ‘형이상학적 반항아’로 변모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논리를 넘어서는 세계—즉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정신의 세계—를 추구했으며, 이때 문학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질서의 증거”였다. 이러한 사유는 상징주의의 정신과 맞닿았지만, 벨리의 경우 단순한 상징의 조형이 아니라 ‘내면적 리듬’을 통한 존재의 해명에 있었다. 그는 예술가를 ‘영혼의 음향을 번역하는 자’로 보았고, 시의 리듬을 우주의 맥박에 비유했다.

그의 대표작인 소설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 1913) 는 러시아 상징주의가 남긴 가장 거대한 형이상학적 미로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도시, 혁명,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루지만, 표면적인 줄거리보다는 ‘의식의 운동’을 중심으로 한다.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파편화와 근대의 불안을 상징한다. 벨리는 이 소설에서 언어를 해체하고, 구문을 뒤틀며, 리듬을 음악적 구조로 변환시켜 서사의 논리를 초월한다. 그에게 문장은 음악처럼 진동하며, 독자는 ‘읽는 자’라기보다 ‘진동을 감각하는 자’로 변한다.

러시아 문단에서 벨리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는 블라디미르 솔로뵈프의 종교적 신비주의와 알렉산드르 블록의 시적 영감 사이에서, 철저히 자기만의 정신적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블록과 더불어 ‘은빛시대’(Серебряный век)를 대표하는 시인이었지만, 그 내면은 언제나 불협화음의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시 「상징」이나 「첫 번째 만남」에서 드러나는 신비적 이미지와 불안한 음악성은, 인간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다가서려는 영혼의 고투를 보여준다.

문학비평가로서의 벨리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미학을 ‘영혼의 과학’으로 이해했고, 비평을 철학과 예언 사이의 행위로 여겼다. 그의 비평집 『상징주의』(1909)는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의 이론적 정점이자 내부 해체의 서곡이었다. 그는 여기서 상징을 “현실과 초현실을 연결하는 영적 문법”으로 정의하며, 예술의 목적은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세계의 내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상징주의의 자기 소멸을 예감했다. 상징이 형식화되고 신비주의가 교조화되자, 벨리는 그 속에서 생명의 리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그의 생각은 점차 인식론적이고 영적인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anthroposophy)에 깊이 영향을 받아, 인간 인식의 변형과 예술의 영적 역할을 탐구했다. 이 시기의 벨리는 언어를 “존재의 신비를 해독하는 도구”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러한 형이상학적 탐색은 그에게 예술적 도약과 동시에 정신적 고립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모든 상징은 결국 언어 이전의 침묵으로 되돌아간다”라고 고백했다.

체호프적 사실주의와 대조적으로, 벨리의 문학은 인물과 사건을 해체하고, ‘정신의 현상학’을 구축한다. 체호프가 인간의 침묵을 통해 윤리적 진실을 탐색했다면, 벨리는 그 침묵의 구조를 언어의 차원에서 해명하려 했다. 이런 점에서 벨리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내면적 형식주의자’이자, 문학을 초월적 질서로 끌어올린 마지막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안드레이 벨리는 예술을 통해 인간 존재의 구조를 해부하고, 언어의 저편에서 신의 흔적을 찾으려 했던 러시아 정신의 실험자였다. 그의 문학은 난해하지만, 그것은 의도된 난해함이다. 세계가 단순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는 예술을 ‘의미의 폭발’이라 불렀고, 그 폭발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언어,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다. 벨리의 문학은 바로 그 꿈의 기록이며, 러시아 상징주의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순도 높은 진동이다.


미하일 게르셰존(Михаил Гершензон, 1869–1925)은 러시아 문학비평의 흐름 속에서 철저히 ‘내면의 윤리’라는 문제에 천착한 비평가로 평가된다. 그의 글은 정치적 혁명이나 사회적 진보보다 인간의 영혼이 지닌 책임과 도덕적 긴장을 탐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문학을 단순한 예술의 장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대답해야 하는 공간”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안톤 체호프의 작품 해석에서 빛을 발한다.

게르셰존은 체호프를 “윤리적 공백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지키려 한 작가”로 규정했다. 그는 체호프의 희곡들을 ‘비극의 부재’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침묵과 정적 속에서 비극의 새로운 윤리를 보았다. 《바냐 아저씨》의 바냐와 소냐, 《세 자매》의 이리나와 마샤, 《벚꽃 동산》의 라네프스카야 등 체호프의 인물들은 시끄럽고 격렬한 사건을 겪지 않는다. 그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고, 구원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게르셰존은 바로 그 ‘행동의 부재’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도덕적 내구성을 보았다. 그는 체호프의 세계를 “무력함의 윤리”라 불렀다. 인간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바로 그 무력함을 인식하고 견디는 과정에서 윤리적 자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체호프의 연극은 사회를 비판하는 사실주의적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 영혼이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비극의 실험실”이었다. 예컨대 《세 자매》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살아야 해요, 일해야 해요”라는 올가의 대사는, 필로소포프나 벨리가 말한 것처럼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게르셰존에게는 “유예된 신앙”이었다. 그것은 아직도 의미를 믿고 싶지만, 이미 의미가 붕괴된 세계에서 절망을 견디는 의식의 표현이었다. 그가 보기에 체호프의 인물들은 신이 사라진 시대의 순례자들이며, 그들의 고통은 ‘신 없이도 인간이 도덕적으로 설 수 있는가’라는 물음의 연극적 표현이다.

《바냐 아저씨》에 대한 게르셰존의 해석은 더욱 심층적이다. 그는 바냐를 “신의 자리를 빼앗긴 인간의 초상”이라 했다. 바냐는 인생의 헛됨을 깨닫지만, 그것을 파괴로 돌리지 않는다. 그는 절망 속에서 절망을 견디는 인간의 형상이다. 게르셰존은 이 작품의 마지막—소냐가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라 말하는 장면—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윤리적 초월의 잔향”으로 읽었다. 세상이 불합리하고 신이 침묵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체호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광기 어린 신앙이나 톨스토이의 도덕적 설교와는 다른, ‘조용한 성자의 문학’을 보여준다고 게르셰존은 보았다.

그는 체호프의 미학을 “침묵의 미학”이라 정의했다. 체호프의 언어는 감정의 폭발을 피하고, 대신 고요한 정적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게르셰존은 그 침묵을 ‘윤리적 음악’이라 불렀다. 등장인물들의 무의미한 대화와 반복되는 일상은 허무의 표현이 아니라, 허무를 인식하는 인간 의식의 리듬이다. 그 리듬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무력함을 바라보고, 그 무력함 속에서 도덕적 존엄을 세우려 한다. 이는 게르셰존이 전 생애를 통해 추구한 ‘비자유의 자유’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은 외적 자유를 잃더라도, 자기 내면을 지배함으로써 가장 깊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바로 그 자유의 가능성을 무의식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게르셰존의 체호프 비평은 문학 해석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근대정신에 베여든 도덕적 위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1909년 그가 베르자예프, 불가코프, 필로소포프 등과 함께 출간한 《벗들에게 보내는 서한(Вехи)》은, 지식인들이 혁명의 열정 속에서 ‘내면의 윤리’를 상실했다고 비판한 선언문이었다. 그는 정치적 자유보다 “양심의 자유”를 중시했고, 체호프의 연극에서 바로 그 양심의 흔적을 보았다. 사회는 붕괴했지만, 인간은 아직 자신을 부끄러워할 양심을 가지고 있다. 게르셰존에게 체호프의 무대는 바로 그 ‘부끄러움의 문명’을 증언하는 장소였다.

이처럼 게르셰존은 체호프를 단순한 사실주의 작가나 우울한 관조자로 읽지 않았다. 그는 체호프를 “절망 속에서도 도덕을 포기하지 않은 연대기 작가”로 보았다. 체호프의 침묵은 무기력이 아니라 윤리적 의식의 형태이며, 그의 일상은 무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마지막 무대였다.


따라서 게르셰존에게 체호프의 세계는 인간의 도덕적 실존을 실험하는 장소이며, 문학은 그 실험을 기록하는 고결한 언어였다. 그는 문학을 “러시아의 양심”이라 불렀고, 체호프를 그 양심의 고요한 목소리로 보았다. 그의 비평은 이념보다 인간, 신앙보다 양심을 향한 성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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