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겨울, 안암동 三五亭 하숙집 골방에서
눈 오는 밤
< I >
깊은 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이 있으면
섬찟 놀래는 가슴으로
흐트러진 세간살이를 정돈하지 않겠는가.
그런 노크 소리로 바람이 불어
아, 눈이라도 휘몰아 내리면
누구일까 설레이는 마음 하지 않겠나.
바스락거리는 가랑잎 소리에도
외로운 들창은 귀 기울이는 겨울밤
산 넘어가는 새떼들이 날개 젓는 소리에,
깊은 산속 시냇물 어는 소리에도
섬짓섬짓 놀래는 겨울밤에
누군가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있으면
반가움에 마음 잃고
글썽거리는 눈물 닦지 않겠나.
< II >
그러면 들어보라
이 길고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
북방의 허허로운 벌판을 지난 뒤,
남의 문 앞에 서서
섣달 그믐밤 다 깊도록
망설이기만 하는
이름 모를 손님의 가쁜 숨소리를
아, 그것은 쓸쓸한 시절에 읽었던
헷세의 어느 구절,
황량한 동토지대를 맨발로 헤매어 온
늙은 늑대의 발자국 소리임에
황망히 문을 열고
바라보는 눈보라.
그 눈바람 뒤 섞인 속에
쓰러질 듯 어두움을 의지한 채
흐릿한 불빛에 놀라워하는
희귀한 짐승 한 마리.
<III>
눈이 내리느니
네발 달린 짐승이 좋지 않으냐.
창세기의 겨울밤
돌아온 애욕의 나를 부둥켜안고
내 허위의 볼을 적시는 눈물 보이면.
그 때야 나는 부끄럽지 않겠다.
제대하고 복학했는데도 세상은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더 엄혹해졌고, 사회는 독재권력의 폭압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숙집 골방조차 마음은 자유롭지 못했고, 일상은 비겁함의 연속이었다. 스물네댓 살 그 시절에 썼던 복학생의 어설픈 시 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