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번역의 푸시킨 시
사랑과 동경과 영예의 속임도
오랫동안 우리를 유혹케 못하였나니
이제 청춘의 희롱은 사라졌어라!
꿈결 같이 아침 안개 같이.
허나 가슴에는 욕망이 불타고,
압도하는 운명의 채찍 밑에
참을 수 없는 마음으로
조극의 부름을 듣고 있어라!
거룩한 자유의 시각이
기어코 오려니 믿으면서
애인을 만나 볼 그 시각처럼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라.
아직도 심장이 자유에 끓고
영예를 위하여 살아 있거든
나의 친구야 조국에 바치자
이 빛나는 마음의 충격을.
동무야 믿어라 기어이 뜨리라
찬란한 행복의 별이
그때엔 로씨야가 꿈을 깨리라,
그리고 파괴된 전제의 터 위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 놓으리라. (1818년 19세)
[詩評]
푸시킨 〈차아다예브에게 보냄〉:
백석 번역으로 읽는 자유와 우정의 시학
푸시킨의 대표적 정치시(政治詩)인 〈차아다예브에게 보냄〉(K Chaadaevu)은 청년 귀족 사회에서 비밀리에 널리 필사되며 당대 러시아 자유주의 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한국 독자에게 이 시가 특별한 울림을 지니게 된 데는 백석 번역이 가진 고유한 시적 품성이 크게 작용한다. 백석은 푸시킨의 단단한 아이앰빅(iambic)과 절제된 격정을 우리말의 평탄한 호흡으로 옮기되, 과장이나 장식 없이 담백한 문장으로 번역함으로써 이 시가 지닌 “끗끗한 결의”의 빛깔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아이엠빅(iambic)”은 운율 단위(feet) 중 하나다. 시에서 운율 단위는 음절의 배치를 말하며, 아이엠빅은 그 중 약강(弱-强) 패턴을 따르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음절은 약하게(weak), 두 번째 음절은 강하게(strong) 발음되는 리듬이다.
이러한 아이엠빅(iambic)은 하나의 “아이엠(iamb)”으로 정의되며, 각 “아이엠”은 두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re-ject”라는 단어에서 첫 음절은 약하게 발음되고, 두 번째 음절은 강하게 발음되는 형태다. 이처럼 약-강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아이엠빅(iambic)의 핵심이다.
백석의 번역에서 특히 눈에 띄는 특징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푸시킨의 격렬한 감정을 억제하면서도, 그 감정의 핵심을 차갑고 서늘한 문장 속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푸시킨의 원문은 분명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정제하여 고결한 결의로 다듬는다. 백석은 이 이중의 정서를 정확히 포착해, 분노를 높이지 않고 대신 말의 뜨거움을 낮추는 방식으로 번역했다. 그 결과 그의 번역 속 푸시킨은 술자리를 휘젓는 혁명 청년이라기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청년 사상가처럼 등장한다.
특히 백석의 번역은 시의 첫머리에서 화자가 느끼는 과거에 대한 실망과 허무를 담담하게 읆는다. 원문이 가진 젊은 날의 공허함, 허황한 이상에 대한 반성적 시선은, 한글로로 옮겨지며 “덧없음”과 “수척함”의 정서로 변주된다. 이는 백석 자신이 1930~40년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비극적 역사 속에서 시를 썼다는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번역에는 푸시킨의 청년기가 아니라, 일제하 조선의 스산한 현실을 살아가는 백석 자신의 체온이 묻어나온다. 이 번역의 울림이 단순한 전이(轉移)를 넘어선 언어적인 공명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지는 시의 핵심 구절, 곧 미래에 대한 신념을 촉구하는 대목에서 백석은 원문의 고양된 톤을 한국어의 정서에 맞게 정갈하게 되살린다. 푸시킨은 “자유의 별”과 “정의의 부름” 같은 표현으로 차아다예브의 영혼을 흔든다. 백석은 이를 과장된 추상 명사가 아니라 우리말 특유의 낮고 맑은 어휘로 번역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믿음을 선언적이기보다 “되뇌는 결심”처럼 들리게 한다. 이러한 번역의 힘 때문에 이 시는 독자에게 혁명의 깃발이 아니라, 긴 어둠 끝에 새벽빛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가온다.
푸시킨의 원문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우정이다. 이 시는 단순한 정치적 선언문이 아니라, 고된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붙들어 주는 두 청년 지식인의 동지적 연대의 기록이다. 백석의 번역은 이 우정의 결을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살린다. “우리”라는 말이 평범하고 조용하게 등장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과장된 동지애가 아니라 고독을 견디기 위한 조용한 버팀목으로 묘사된다. 이 역시 백석이 즐겨 쓰는 서늘하고 외로운 시세계와 맞닿아 있다.
백석의 번역은 또한 푸시킨의 아이앰빅 리듬을 한국어의 호흡으로 다시 직조한다. 러시아어의 강약 박동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백석은 짧고 긴 구절을 교차시키며 호흡의 장력을 살려낸다. 이 호흡은 시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길어지며 희망의 여지를 넓히는데, 이는 푸시킨의 원문에서 미래를 향한 고양감이 상승하는 구조와 정확히 상응한다. 이처럼 번역의 리듬을 통한 구조적 호응은 백석 번역의 가장 높은 성취 중 하나이다.
결국 백석이 번역한 〈차아다예브에게 보냄〉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러시아어의 역사적 시심이 한국어의 시대적 감각과 만나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시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푸시킨의 격렬한 이상주의는 백석을 거치며 조용하고 슬픈 희망으로 변모하고, 그 희망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다시 현실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로 살아난다. 이러한 변용은 번역이 아니라 일종의 “공감의 재창조”라 부를 만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읽을 때, 열정적인 러시아 청년 푸시킨의 목소리와 더불어 암울한 시대를 견디던 조선의 시인 백석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백석 번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독특한 울림이며, 〈차아다예브에게 보냄〉이 한국 독자에게 특별한 이유다.
차아다예프
러시아 지성사의 ‘시작점’
역사의 문턱에 선 고독한 사상가
러시아 사상사에서 차아다예프라는 이름은 언제나 ‘고독’이라는 그림자와 함께 떠오른다. 귀족적 세련됨, 유럽적 교양, 기독교적 사유의 깊이를 갖춘 인물이었다. 한편 그의 사상은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시대보다 앞서 있었다. 19세기 초 러시아는 아직 제국의 전통 속에 머물러 있었고, 지식인의 세계는 과감한 철학적 질문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차아다예프는 “러시아는 역사의 주변부에 있다”는 한 문장으로 제국의 신경을 건드렸고, 결국 그는 시대의 경계선에서 떠도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 고독은 단순한 개인적 기질이 아니라 그의 사유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는 서유럽 문명의 구조를 이해했고, 그 역사적 연속성에 깊이 감동받았다. 계몽주의와 기독교의 결합, 가톨릭이 만들어낸 보편적 질서, 시민의 자유와 합리성의 명맥이 이어지는 유럽의 흐름 속에서 그는 “문명”이라는 것을 하나의 살아 있는 정맥처럼 보았다. 반면 러시아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을 내린다. 거대한 자연과 신비로운 정교의 전통이 있음에도, 사회적 제도나 정치·지적 토대는 유럽의 보편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차아다예프의 사유는 이 두 문명의 간격을 날카롭게 의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푸시킨과의 우정은 그의 인생에서 드물게 따뜻한 장면을 만들어준다. 젊은 시절, 푸시킨은 그를 정신적 동지로 보고 〈차아다예프에게 보냄〉이라는 시를 통해 “자유의 아침을 꿈꾸던” 그 시절의 열정을 함께 나누었다. 둘 사이에는 시대정신을 향한 갈증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택한 길은 갈라진다. 푸시킨이 시의 문장 속에서 시대를 달래고자 했던 반면, 차아다예프는 철학적 단언으로 제국의 정당성을 정면에서 흔들었다. 푸시킨이 그를 존경했던 이유는 바로 이 지적 용기 때문이었다.
1836년 『철학서한』이 발표된 순간, 차다예프의 삶은 크나큰 불운에 직면한다. 러시아는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정신이상 판정을 내렸고, 그는 사실상의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 문장은 러시아 사상사를 뒤흔드는 씨앗이 된다.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가 격렬하게 논쟁하던 19세기 중반, 모두가 차아다예프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러시아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 이후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에세이 형식의 인물평으로 그를 바라보면, 차아다예프는 역사에 맞서 싸운 영웅이라기보다 자신의 시대를 너무 앞서 살아버린 사색가이다. 그는 러시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 가혹하게 비판했다. 그는 문명을 이해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국이 지닌 가능성과 결핍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의 글이 냉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감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잔잔하지만 깊은 절망과 애정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지성사가 그를 ‘시작점’으로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의 비판이 날카로워서가 아니다. 그가 던진 질문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러시아를 바라보는 많은 사상가들은 여전히 차아다예프의 문장으로 돌아간다. 문명과 고립, 보편성과 특수성, 세계 속의 러시아라는 문제는 그가 아니라면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아다예프는 어쩌면 패배한 사상가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외로운 그의 목소리는 시대를 건너 살아남았다. 그는 시민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대에도, 러시아의 정신적 미성숙을 과감히 지적할 수 있었던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지금도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간극을 성찰하는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기도 한다.
결국 차아다예프를 이해한다는 것은 러시아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조국을 비판함으로써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준, 드문 종류의 애국주의자였다. 그의 글은 러시아의 미래가 묻어 있는 오래된 질문이며, 그 질문을 직시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불편한 진실을 던지고 있다.
푸시킨과 차아다예프
자유를 꿈꾸던 두 청년의 우정
19세기 초 러시아는 거대한 전환의 초입에 서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과 지식인들은 처음으로 유럽이라는 거울 앞에 섰다. 그들은 제정러시아의 후진성을 뼈아프게 자각했고, 동시에 자유와 이성, 시민적 각성이 무엇인지를 눈으로 보았다. 알렉산드르 1세가 표방하던 개혁은 흐릿해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젊은 엘리트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소리 없이 희망의 불꽃이 타고 있었다. 푸시킨과 차아다예프의 우정은 바로 이런 열정 속에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만남의 배경에는 러시아가 근대라는 문턱 앞에서 갈팡질팡하던 어둡고 숨막히는 공기가 흐르고 있있다. 차아다예프는 프랑스 전선에서 철학적 사상을 품게 되었고, 푸시킨은 리체이 시절부터 자유주의적 감수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청년은 사교 살롱과 지성인들의 모임에서 마주치게 된다. 마침내 둘은 서로의 결핍을 보완하는 정신적 친구가 된다.
푸시킨은 차아다예프에게서 단순한 사상가의 모습이 아니라, 러시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성인의 얼굴을 발견했다. 반대로 차아다예프는 푸시킨에게서 철학의 추상성에 갇히지 않은, 생기와 재능과 언어의 힘을 본다. 둘의 대화는 젊은 날에 흔히 그려지는 공상의 시간이 아니라, 나라와 사회의 운명을 고민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열정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1818년, 푸시킨은 바로 이 친구에게 유명한 시〈차아다예프에게 보냄〉를 바친다. 이 시는 한 친구에게 보내는 우정의 인사를 넘어서, 청년 세대가 품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었다. 러시아가 언젠가 깨어날 것이라는 믿음, 밝은 미래가 지금의 억압을 뚫고 피어오를 것이라는 희망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차아다예프는 이 시를 단숨에 읽었을 것이다. 그들의 우정은 이처럼 감성을 뛰어넘어 지적 연대의 긴장감 속에서 빛났다.
그러나 우정의 길이 언제나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봉기는 두 사람 모두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었다. 푸시킨은 봉기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들과 청년 시절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검열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차아다예프 역시 운동의 핵심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한 바 있었다. 봉기 이후 러시아는 더욱 폐쇄적인 방향으로 돌아섰고, 이 두 친구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그림자 아래 놓였다.
푸시킨은 시로서 자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지만, 차아다예프는 침묵 대신 사상을 고하는 저술 활동을 선택했다. 그의 사상이 〈철학서한〉이란 저술로 폭발했을 때, 그는 정신이상 판결이라는 극단적 탄압을 받는다. 푸시킨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검열에 시달려도 그는 요령껏 시를 쓸 수 있었으나, 차아다예프는 '생각한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제’당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길은 자연스레 멀어졌지만, 서로를 향한 존중만큼은 식지 않았다. 푸시킨은 차아다예프의 고독을 이해했고, 차아다예프는 푸시킨을 러시아 정신의 빛으로 평가했다. 그들의 우정은 정치적 동지애보다 깊고, 단순한 감정적 유대보다 더 의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여한 의미는 결국 러시아 지성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
푸시킨과 차아다예프의 우정은 한 시대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았다. 억압의 시대였지만, 그 안에는 변화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그 씨앗 위에 드리운 두 개의 빛이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꿈꾸었기에, 그들의 길은 다르게 흘렀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러시아가 자유를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떠올린다. 이는 그들의 우정이 개인적 감정일 뿐 아니라, 러시아의 미래를 향한 공동의 신념이었음을 후대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