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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죽음

미하일 레르몬토프

by 김양훈

시인의 죽음

미하일 레르몬토프


시인의 마음은

사소한 치욕조차 용인할 수 없었으니

그는 홀로

세상의 입방아에 맞서

일어섰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였다!

통곡과

헛되이 울리는 합창의 찬양

조용히 되뇌이는 변명들은

이제 다 무슨 소용이랴.

운명의 선고는 이미 내려졌다!

당신들이 그를

악독한 마음으로 내치지 않았던가

그의 자유롭고 용맹한 재능을….

그대들 마음의 심심풀이를 위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피지 않았던가.

그래. 즐길 대로 즐겨라. 그는

마지막 고통을 견뎌내지 못했다.

놀라운 천재는 초롱불처럼 사그라들었다.

화사한 화관은 시들었다.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1814~1841)는 푸시킨에게 바치는 추도시로 유명해지지만, 그전에도 엄청난 분량의 서정시나 서사시, 희곡, 역사 소설 등의 습작을 했다. 산문 소설인 『우리 시대의 영웅』(1840) 이외에 서사시 『악마』,『므치리』(1840), 희곡 『가장무도회』(1842)가 있고, 『나 홀로 길을 가네』와 같이 요즘에도 즐겨 읽는 서정시를 다수 썼다.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하지만, 러시아 리얼리즘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1841년 7월, 결투로 캅카스의 퍄티고르스크 근교에서 쓰러졌다.

불세출의 시인 푸시킨은 1837년 2월, 결투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다. 이는 그의 명예를 건드리면서 비웃기 좋아했던 저급한 자들의 음모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사건이었다. 곧 이 사건의 경위를 폭로한 추도시가 등장했는데 너도나도 이 시를 베껴대는 통에 레르몬토프의 시는 페테르부르크 전체에 퍼졌다.

"시인의 마음은, 사소한 치욕조차 용인할 수 없었으니”로 시작되는『시인의 죽음』을 읽으며, 시민들은 누구나 이 무명의 작가에게 푸시킨의 재능이 계승되었음을 직감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반체제 시인이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에 격노해 즉각 작가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체포된 자는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라고 하는 젊은 근위기병 하사관이었다. 그는 푸시킨과 마찬가지로 그림에도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

레르몬토프의 「시인의 죽음」
— 분노가 부른 시, 혁명적 감각이 부른 박해

레르몬토프의 시 「시인의 죽음」은 1837년 1월,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억울한 결투로 목숨을 잃자마자 쓰인, 러시아 문학사에서 뜨거운 분노의 선언 가운데 하나다. 이 시는 푸시킨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제정러시아의 귀족 사회, 궁정 문화, 황실 권력의 위선을 정면으로 고발한 정치적 선언문이다. 레르몬토프는 스물두 살 청년이었음에도 이 시에서 문학적 애도를 넘어, 권력과 결탁한 귀족 사회가 푸시킨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직설적으로 공격한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추모시가 아니라, "러시아의 양심이 폭발한 순간"이었고, 짜르 체제를 향한 첫 공개 비판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 사회는 푸시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궁정은 푸시킨 죽음의 책임을 은폐하려 했고, 푸시킨을 둘러싼 중상과 음모에 가담한 인물들은 사실상 처벌받지 않았다. 레르몬토프는 이러한 분위기에 강한 분노를 느꼈고, 「시인의 죽음」에서 귀족 사회를 ‘잔혹한 폭도’, ‘러시아 자유의 살해자’로 지칭하는 파격적 언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어법은 기존 러시아 시문학이 유지하던 온건한 문체를 넘어선 것으로, 젊은 시인의 새로운 도덕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이 분출된 결과였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특히 폭발적이다. 레르몬토프는 푸시킨을 죽인 자가 단지 한 개인의 ‘명예’를 둘러싼 결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유와 재능을 미워한 악한 힘”이라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 “심판의 날이 다가올 것이며, 러시아의 미래 세대가 그 죄인들을 단죄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사실상 황실 권력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당시 니콜라이 1세 체제는 데카브리스트 반란 이후 지식인과 문예계를 강도 높게 검열하고 있었으며, 정치적 비판을 극도로 억압했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레르몬토프의 시는 문학적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예상대로 왕실과 주변 권력의 반응은 폭력적이었다. 「시인의 죽음」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식층 사이에서 비밀리에 유포되자, 황실 경찰은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고 니콜라이 1세는 레르몬토프를 ‘위험한 급진주의자’로 규정한다. 그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징계 조치로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위험한 국경지대인 캅카스 전선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군 복무가 아니라 사실상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처벌이었다. 레르몬토프에게 캅카스는 고통의 공간이자, 역설적으로 그의 문학적 토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시적 단련의 장소’가 되었다.

시인이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도 박해는 계속됐다. 황실은 레르몬토프가 문단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고, 새로 출판한 그의 새로운 작품이 지닌 비판적 태도를 억압했다. 결국 그는 1841년 다시 캅카스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27세의 나이로 결투를 벌이다 푸시킨처럼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많은 문학사가들은 이 죽음이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제정러시아 권력의 지속적 감시와 적대적 압박 속에서 발생한 ‘정치적 죽음’이라고 평가한다.

레르몬토프의 「시인의 죽음」의 문학사적 의의

레르몬토프는 푸시킨을 잃은 상실감을 슬픔으로만 채우지 않고, 시대가 갖는 도덕적 책임을 묻는 선언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그 대가로 혹독한 박해를 감수했다. 이 시는 러시아 문학에서 ‘시인이 현실과 권력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첫 본보기였다. 이후 러시아 시인들이 ‘예언자’ 혹은 ‘도덕적 심판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전통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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