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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정의

by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y 김양훈

시의 정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이것은 한순간 흘러넘치는 휘파람,

이것은 짓눌린 얼음조각이 튀는 것,

이것은 잎사귀가 얼어붙는 밤,

이것은 꾀꼬리 두 마리의 논쟁.


이것은 달콤하고 시든 완두콩,

이것은 콩깍지 속 세상의 눈물,

이것은 악보대와 플루트에서 화단으로

우박처럼 떨어지는 피가로의 결혼.

이것은 욕조의 깊은 바닥에서

밤이 꼭 찾아내야 하는 모든 것,

땀에 젖은 손바닥을 떨며

새벽까지 별을 옮기는 일.


물속의 널빤지보다 넓은 것은 무더위.

오리나무로 가득한 창공.

이 별들의 표정에 어울리는 것은 웃음.

하지만 우주는 소리 없는 곳.

여기서 ‘시’라는 것은 휘파람에서 잎사귀가 얼어붙은 밤을 거쳐 욕조 바닥의 별들로 변신하다가, 끝내 소리 없는 우주에 이르러 사라진다. 「시의 정의(定義)」라는 관념적인 제목은 이러한 변신과 사물로의 귀환을 위해 일종의 동기가 되어줄 뿐이다. 「삶은 나의 누이」의 “열차 시간표가 성서보다 장엄하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이러한 귀환의 상징으로 읽어도 좋은 것 같다.
이제 삶은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한 성서적 관념보다, 산문화된 사물의 시간에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것은 이 사물들의 시간 자체이며 또 사물과 풍경의 한량없는 전승에 다름 아니다.
이장욱 著 「혁명과 모더니즘」(영원의 인상주의: 파스테르나크) 中 발췌.

[詩評]

감각과 존재의 경계에서 피어난 언어의 풍경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기 시, '시의 정의(Определение поэзии)'는 시(詩)라는 개념을 논리적 사유가 아닌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의 총체로 그려내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시의 본질을 탐구하지만, 시인은 추상적인 정의 대신 자연 현상, 음악, 일상 속 순간들을 포착하여 독자에게 '시란 바로 이것이다'라는 직접적인 체험을 보여주려 한다. 이 시는 파스테르나크 특유의 복잡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즘과 주관적인 리듬 감각이 압축된 작품이다.

1. 감각의 폭발과 메타포의 전시장

이 시는 매우 파편적이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들을 병치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첫 연부터 시는 "한순간 흘러넘치는 휘파람," "짓눌린 얼음조각이 튀는 것," "꾀꼬리 두 마리의 논쟁" 등, 순간적으로 느끼는 청각과 촉각을 통해 시의 생명력을 포착한다. 특히 시각적인 것보다는 소리, 움직임, 온도와 같은 비정형적 감각을 통해 시의 본질이 정지된 상태가 아닌, 살아 숨 쉬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2연(聯)에서는 이미지가 더욱 복합적으로 얽힌다. "달콤하고 시든 완두콩," "콩깍지 속 세상의 눈물"은 생명력과 소멸,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유기적인 삶의 비의(秘義)를 드러낸다. 이어지는 "피가로의 결혼""우박처럼 떨어지는" 장면은 음악과 현실, 예술과 자연이 충돌하며 새로운 의미를 낳는 시적인 순간을 시각화한다. 여기서 시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소재들 속에서 비범한 울림을 창조하는 연금술 같은 행위가 된다.

2.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적 노동

3연(聯)은 시 쓰기의 행위 자체를 숭고한 노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욕조의 깊은 바닥에서 / 밤이 꼭 찾아내야 하는 모든 것"은 시인이 무의식의 심연이나 잊힌 기억 속에서 진실을 발굴해 내는 과정을 은유한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떨며 / 새벽까지 별을 옮기는 일"이라는 구절은 압권이다. 별은 시의 소재이자 우주적인 진리이며, 이를 '옮기는' 행위는 인간적인 열정과 고뇌를 담은 채 무한한 우주의 질서를 언어라는 유한한 틀 속에 재배치하려는 시인의 창조적 고투를 상징한다. ‘시의 정의’는 곧 밤샘 노력과 새벽의 깨달음을 통해 세계의 신비를 포착하려는 작업이야말로 시인의 임무임을 말하고 있다.

3. 침묵 속의 외침: 존재론적 사유

마지막 4연(聯)은 시의 존재론적 위치를 묻는 듯하다. "물속의 널빤지보다 넓은 것은 무더위," "오리나무로 가득한 창공"과 같은 구절은 대상의 크기와 속성을 전복시키며, 시가 현실의 물리적 법칙을 초월하는 확장된 감각의 세계임을 강조한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은 가장 큰 울림을 준다.

“이 별들의 표정에 어울리는 것은 웃음. / 하지만 우주는 소리 없는 곳.”

이 대조는 시의 비극적이면서도 희망적인 본질을 드러낸다. 시인은 우주의 장엄함과 별의 신비로움을 읽어내며 '웃음'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투영하려 하지만, 결국 우주 자체는 '소리 없는 곳'이라는 진실에 직면한다. 시란 이 침묵하는 우주와 말하려는 인간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인 것이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시는 세상의 소리 없는 고독 속에서 인간의 감각과 영혼을 증명하려는 고독하고 절실한 노력이다.

결론

'시의 정의'는 시의 본질을 명사(名詞)가 아닌 동사(動詞), 즉 끊임없이 변화하고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와 현상의 집합으로 규정한다. 파스테르나크는 감각적 이미지, 음악적 리듬, 그리고 시인의 치열한 노동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시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체험하게 만든다. 이 시는 파스테르나크의 시적 방법론, 즉 삶의 순간성과 자연의 역동성을 포착하여 언어로 재창조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를 통해 침묵하는 우주에 말을 걸고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려는 시인의 영원한 염원을 담고 있다.


파스테르나크와 마야콥스키

파스테르나크는 세 살 연하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Влади́мир Маяко́вский, 1893-1930)의 시와 혁명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파스테르나크를 지배했던 지적 코드로는 흔히 음악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 1915), 문학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철학의 헤르만 코헨(Hermann Cohen, 1842–1918)을 들지만, 마야콥스키야말로 인간 자체로서 그를 압도했던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자전적 에세이 「안전통행증」(Okhrannaia Gromota)에서 마야콥스키와의 만남에 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원심분리기’¹의 멤버들이 건달풍이 마야콥스키 그룹과 설전을 벌이던 아르바트 거리의 첫 만남이 끝난 그날 저녁에 대해, 파스테르나크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미친 듯이 마야콥스키에게 빠져버렸다. 벌써 그가 그리웠다.”

[註1] '원심분리기(Centrifuga)'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러시아 미래주의의 역동적 분화
러시아 문학사에서 '원심분리기(Центрифуга, Centrifuga)' 그룹은 1910년대 중반, 격동하는 러시아 모더니즘의 한가운데서 탄생한 가장 지적이고 실험적인 미래주의 분파로 자리매김한다. 이들은 단순히 당대 문학의 거장들, 즉 상징주의와 아크메이즘에 반기를 들었을 뿐 아니라, 미래주의(Futurism)라는 거대 사조 내에서도 독자적인 문학적 기율을 세우려 고투했던 젊은 아방가르드 시인들의 집합체였다.
이 그룹의 명칭인 '원심분리기' 자체가 이들의 미학적 지향점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메타포다. 기계 장치인 원심분리기가 회전을 통해 혼합물질의 중심을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분리하듯, 이들은 언어와 시의 의미 중심을 고정된 자리에서 떼어내어 새로운 역동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는 시의 의미가 전통적인 종결부나 핵심 단어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시 전체의 리듬, 음향, 이미지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순환하며 발생해야 한다는 신념을 반영한다.
1. 미래주의의 정교화와 지성적 실험
'원심분리기'는 미래주의의 핵심이었던 에너지, 속도, 도시적 역동성이라는 테마를 계승하면서도, 파격적인 파괴와 원시성을 강조했던 마야콥스키(Mayakovsky) 중심의 길레야(Gileya) 그룹과는 노선을 달리했다. 길레야가 언어의 '자족성(заумь, 자움)'을 추구하며 비합리적인 언어 실험을 시도했다면, '원심분리기'는 보다 정교하고 지적인 구성과 복잡한 수사학적 기교를 통해 시적 의미를 탐구했다.
그들의 시는 음악적 구조와 복합적인 심상(Imagery)에 깊이 의존했다. 시구의 배열, 단어의 선택, 심지어 행과 행 사이의 리듬적 간격까지도 고도로 계산되어 독자에게 순간적인 감각의 충돌과 주관적인 인상의 병치를 제공했다
2.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원심분리기의 핵심/이 그룹의 가장 중요한 멤버이자 후일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 된 시인은 바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다. 그의 초기 시 세계는 '원심분리기'의 미학을 가장 명징하게 구현한다.
파스테르나크의 초기작을 관통하는 특징은 '대자연의 에너지를 담는 언어'이다. 그의 시는 날씨, 자연 현상, 일상적 사물 등을 극적인 메타포로 포장하며, 세계를 정지된 그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 그려낸다. 앞서 논의되었던 시 '시의 정의'에서 "짓눌린 얼음조각이 튀는 것," "새벽까지 별을 옮기는 일" 같은 구절은 '원심분리기'가 추구했던 동적인 이미지즘과 시인의 치열한 창조적 노동을 완벽하게 결합시킨 사례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시는 언어를 통해 무한한 우주적 에너지를 유한한 지면 위에 압축하여 폭발시키는 원심분리 과정이었다. 그의 복잡하고 주관적인 심상은 독자에게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하며, 시의 중심(정의)을 고정된 개념이 아닌 끊임없이 변모하는 감각적 체험의 장으로 만들었다.
3. 그룹의 해체와 영향
'원심분리기' 그룹은 러시아 혁명 전후의 혼란기를 거치며 그룹으로서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기했던 시의 운동성과 언어 구조의 실험 정신은 후대의 러시아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이 시기 동안 확립한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시풍을 바탕으로 이후 서정시의 대가로 성장하여, 혁명 이후 소련 문학의 복잡한 흐름 속에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문학적 궤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 문학사에서 '원심분리기'의 멤버들은 단순한 미래주의 추종자가 아니라, 언어의 역동성과 의미의 순환을 실험하며 러시아 시의 형식적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 지성파 아방가르드 시인들이며, 그 중심에는 러시아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우뚝 서 있다.

마야콥스키가 자살하던 1930년, 그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마야콥스키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연하게 깨닫는다. 그는 격정으로 가득한 마야콥스키의 삶과 죽음을 ‘로맨틱한 영웅주의’라고 적는다. 마야콥스키와 예세닌²은 당대에 이미 전설이었다. 그네들의 자살은 이 전설의 완성이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이 좀 더 온건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영웅주의와 피의 냄새’를 요구하지 않는 온유함을 택했다. 애초에 그의 성정 자체가 미래파적인 역동성이나 정치적 불온함과는 거리가 멀었는지도 모른다.

[註2]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се́нин, 1895~925)은 1895년 10월 3일 랴잔 지방의 콘스탄티노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세르게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파스 클레프키 마을에 있는 교사 세미나에 갔는데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이곳에서였다. 지도교사의 조언에 따라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위해 그는 1913년 3월 모스크바로 떠난다.
1915년 3월 9일, 상징주의 시의 대가 알렉산드르 블로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진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블로크는 예세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도움을 주었으며 그를 “천부적인 재능의 농민시인”으로 불렀다. 예세닌은 자신이 블로크와 클류예프로부터 서정시풍을 배웠고, 벨리로부터는 형식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1916년 2월, 첫 시집인 ≪초혼제≫가 출간되자, 예세닌의 명성은 순식간에 높아져 황후와 공주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황금 시계와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나 예세닌은 혁명에 동감해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예세닌은 1919년을 자기 생애 최고의 해로 간주했다. 그에게 서점과 출판사, 보헤미안 문학 카페인 ‘페가수스의 마구간’에 대한 감독권이 주어졌다. 이 시기 그는 여러 시인과 함께 ‘이미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미지주의 문학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8년 혹은 1919년에 예세닌은 공산당에 가입하고자 지원했다. 그러니 그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어떤 혹은 모든 규율에 이질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열정적인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점차 소외와 고독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1921년에 그는 “흔히, 서정시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라고 적는다.
1921년 11월, 예세닌은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을 만났다. 그녀는 그보다 열일곱 살 연상이었다. 그들은 1922년 5월 2일 결혼했고, 5월 10일 유럽과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미국 생활은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는 뉴욕을 혐오했으며 자살을 생각할 만큼 권태로웠다. 그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영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예세닌은 덩컨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음주와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23년 8월 5일경 그들은 모스크바로 되돌아왔고 10월 말경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예세닌은 권태와 우울증에 빠졌으며, 알코올 중독과 환각으로 고통을 받았다. 정신적 안식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두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무력감을 느꼈다.
1925년, 예세닌은 장시 <페르시아 모티프>와 <안나 스네기나>를 썼던 바쿠로 갔다. 환각이 그랬던 것처럼 피해망상증도 그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1월 그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12월 21일 그는 갑자기 병원을 떠나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페테르부르크로 떠나 호텔에 투숙해 12월 28일, 성상(聖像)이 놓인 구석의 수도관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확실히 파스테르나크는 ‘순수’의 시인이었다. 파스테르나크의 시적 기원 중 하나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는 것도 적어둘 만하다. 릴케가 열세 살 연상의 연인 루 살로메와 러시아를 여행하던 시절, 겨우 열 살의 파스테르나크는 기차간에서 만난 릴케를 하나의 신비로운 ‘실루엣’으로 기억하게 된다. 릴케 외에 인노켄티 아넨스키(Innokenty Annensky, 1855년~1909년) 같은 시인을 파스테르나크의 시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아넨스키식의 모호하고 데카당한 경향이 없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음울하거나 병적인 시인이 아니었다. ‘시대와의 불화’가 그의 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있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햇살이 내리는 환한 정원에 어울리는 시인이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전세기적 음울함에 시달리던 러시아 모더니스트들 가운데 그가 지니 독특함일는지도 모른다. - 이장욱 著 「혁명과 모더니즘」(영원의 인상주의·파스테르나크)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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