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삶은 나의 누이
파스테르나크
삶은 나의 누이, 오늘도 봄비처럼 넘쳐
-만상에 닿아 부서지네.
그러나 고상한 이들은 팔찌를 낀 채 불평하며
귀리밭의 뱀처럼 정중하게 삶을 물어뜯지.
노인들에겐 그럴 만한 제 이유라도 있을 테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대의 이유는 우습네.
소나기 내린 날 두 눈과 잔디는 연보랏빛.
그리고 지평선은 물푸레 향기로 젖어 있다는 것.
그리고 5월, 카뮈신¹으로 가는
-열차의 찻간에서
열차 시간표를 읽으면,
그것은 성서보다
먼지바람에 검어진 좌석보다 장엄하다는 것.
포도주 빛깔에 잠긴
-외진 마을 사람들 앞에 기차가
제동기 소음을 울리며 정차한다는 것.
침대칸에 앉은 채 사람들은
-내릴 역이 아닌지 내다보는데,
태양은 저물며 나를 동정하네.
내릴 역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고
-계속 사과하는 듯
기적은 세 번 울리고 흩어지네.
커튼 아래로는 밤이 타오르고
벌판을 향한 계단에서 무너지네.
깜빡이고, 명멸하고,
하지만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달콤하게 잠들고,
사랑하는 그녀도
-요정 모르가니²처럼 잠들어 있으리.
그 시간, 마음은 승강구에 부딪치며,
열차의 문들을 벌판에 뿌리고 있네.
[註]
1) 카뮈신(Kamyshin, Камышин)은 러시아 남서부, 볼고그라드주(Volgograd Oblast)에 있는 도시다. 볼가江(Volga River)과 맞닿아 있으며, 카미신카江(Kamyshinka River)이 흘러 들어가는 곳인 볼고그라드(구 스탈린그라드)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1600년대 후반 표트르 1세(Peter I the Great) 시대에 요새로 건설되었다. 파스테르나크의 시에서 카뮈신은 모스크바와는 거리가 먼, 외곽의 소박한 지방 도시의 이미지를 가진다. 시인이 "5월, 카뮈신으로 가는 열차의 찻간에서" 열차 시간표를 읽는 장면은, 일상적인 여정 속에서 뜻밖의 장엄함과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순간을 강조하는 시적 배경이 된다.
2) '모르가니'는 아서 왕 전설의 강력한 마법사 모르가나 르 페이(Morgan le Fay)를 의미한다. 이 인용은 화자의 '사랑하는 그녀'에게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시적 대비를 이룬다. '요정 모르가니처럼 잠든' 그녀의 모습은 비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그녀를 숭배하는 화자의 시선을 반영한다. 또한 기차 안에서 격정적인 내면("마음은 승강구에 부딪치며")을 겪는 화자와 달리, 그녀는 신화적이고 고요한 평화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이 대비는 화자의 고독하고 현실적인 고뇌와 사랑하는 이의 이상적인 신성함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며, 시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영원의 인상주의: 파스테르나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1890~1960)는 소설 「닥터 지바고」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의 본업은 소설이 아니라 시(詩)였다. 「닥터 지바고」는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 러시아가 아닌 이탈리아에서 발간되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지닌 탈(脫) 볼셰비키 정치학 때문이다. (후략)
삶(жизнь)을 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인화이며, 그러므로 은유의 한 형태다. 러시아에서 ‘삶‘이라는 명사는 여성형이므로, 이 은유적 전이(轉移)는 러시아어로 읽을 때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의인화된 삶-누이가 시의 마지막까지 정말 살아 있는 풍경들로 펼쳐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렇게 펼쳐지는 과정을 통해서 삶-누이는 은유이기를 멈추고 현실의 사물들에 젖어든다. 그는 추상적인 어휘를 자주 사용하지만, 이 추상적인 어휘들은 지극한 구체성과 물질성으로 잇닿아 끝내 제 추상성을 잃는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객관화되거나 사물화 된다. 추상의 지평에서는 형체 없이 무한한 어휘들이, 사물이나 인간의 몸을 얻어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에 스스로 결박된다. 바로 이 변신의 순간이 파스테르나크의 시학을 규정한다. 누이에서 소나기와 잔디와 지평선 그리고 열차 바깥의 풍경으로 이어지면서, 삶이라는 추상명사는 구체적인 풍경의 물질성들로 서서히 귀환한다.
- 이장욱 著 「혁명과 모더니즘」에서 발췌.
[詩評]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의 시 「삶은 나의 누이」는 1922년에 쓰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며, 파스테르나크의 초기 시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삶'은 생존의 의미를 넘어, 생동하는 자연과 예측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존재로 의인화된다.
1. '누이'로서의 삶: 경탄과 비판의 시선
제목에서 삶은 '누이'로 설정된다. 누이는 가깝고 친밀하지만, 연인이나 아내처럼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독립적이고 동등한 경이의 대상이다.
*1연의 경탄: 삶은 "봄비처럼 넘쳐 / 만상에 닿아 부서지네"라며, 그 활력과 풍요로움이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한다.
*고상한 이들에 대한 비판: 화자는 삶의 넘치는 생동력에 경탄하는 동시에, "고상한 이들"이 삶을 "귀리밭의 뱀처럼 정중하게 물어뜯는다"고 비판한다. 이는 삶을 경직된 도덕이나 규범으로 재단하고 훼손하려는 속물적인 태도, 또는 지루한 일상을 사는 이들에 대한 시인의 격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2연에서 '노인들'의 이유와 달리 '그대'(아마도 그런 고상한 이들 중 한 명)의 이유는 우습다고 단정하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2. 일상 속의 장엄함과 감각적 이미지
파스테르나크 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에서 종교적, 우주적 장엄함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자연의 감각: "소나기 내린 날 두 눈과 잔디는 연보랏빛", "지평선은 물푸레 향기로 젖어 있다는 것" 등의 구절은 시각, 후각 등 다채로운 감각을 동원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한다.
*열차와 시간표의 숭고함 (3연): "카뮈신으로 가는 열차의 찻간에서 / 열차 시간표를 읽으면, / 그것은 성서보다 / 먼지바람에 검어진 좌석보다 장엄하다는 것"이라는 표현은 파스테르나크 시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표라는 질서와 약속이 신의 계시인 성서보다 더 현실적이고 경이로운 질서로 다가오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삶의 모든 순간이 신성해질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3. 기차 여행: 움직이는 시공간과 내적 고독
시의 후반부는 기차 여행이라는 움직이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차는 곧 삶의 여정이며, 창밖의 풍경과 찻간 안의 내면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정차와 미련 (4~5연): 외진 마을에 기차가 정차하고, "태양은 저물며 나를 동정하네"라는 감정 이입은 일시적인 고독과 덧없음을 표현한다. 기차가 사과하듯 기적을 울리며 흩어지는 모습은,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삶의 운명 또는 지나가버린 순간들에 대한 미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밤의 파열과 마음의 분출 (6연): 밤이 "커튼 아래로 타오르고" "벌판을 향한 계단에서 무너지"는 표현은 단순한 어둠이 아닌, 강렬하고 감정적인 밤의 이미지를 만든다. 최종적으로 화자의 '마음'은 "승강구에 부딪치며, / 열차의 문들을 벌판에 뿌리고 있네"라고 절정에 달한다. 이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격정적 분출이자, 기차라는 닫힌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벌판으로 향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을 표현한다. 사랑하는 이가 잠든 시간(요정 모르가니), 화자의 마음은 강렬하게 현실을 넘어선다.
생명의 축제로서의 시
「삶은 나의 누이」는 파스테르나크의 시가 감각적이고 격정적이며, 일상과 우주를 한 호흡에 담아내는 생명의 축제와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정형화된 삶의 틀을 거부하고, 빗방울, 시간표, 기차의 소음과 같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 속에서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며, 독자에게 삶의 경이로움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