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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

빛과 그림자의 화가,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산

by 김양훈
빛과 그림자의 화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가 아들에게 남긴 유산

레오니트 오시포비치 파스테르나크(Leonid Osipovich Pasternak, 1862–1945)는 러시아의 격동적인 황금기와 은세기를 가로지른 이름난 화가이자,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작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다.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가 아들 보리스에게 물려준 것은 예술적 DNA뿐 아니라, 20세기 러시아 지성의 정수가 녹아 있는 문화적 토양이었다.

I. 예술적 분위기의 형성: 모스크바의 살롱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는 키예프 출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회화·조각·건축 학교(MSPA)를 졸업했다. 그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혼합된 독특한 화풍으로 당대 러시아 미술계를 주도했다. 그의 아내, 로잘리야 카우프만 역시 저명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셀럽'이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는데, 유년기의 가정 분위기는 ‘예술적인 살롱’ 그 자체였다. 레오니트의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었고, 러시아와 유럽 문화계의 거장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교류의 장소였다.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연주를 했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방문했으며, 작가 막심 고리키와 안톤 체호프가 그의 집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Pencil portrait of Tolstoy by Leonid Pasternak

가장 중요한 만남은 레프 톨스토이였다. 레오니트는 톨스토이의 마지막 소설 《부활》의 삽화가로 활동하며 톨스토이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보리스는 어린 시절부터 톨스토이의 별장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드나들었고, 톨스토이가 아버지의 작업실에 앉아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이러한 환경은 보리스에게 예술가란 당대의 사상을 선도하는 지성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사회적 책임감의 근간이 되었다.

II. 화가의 시선: 디테일과 순간 포착

레오니트의 화풍은 아들의 문학적 스타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레오니트는 인물들의 섬세한 표정 변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빛의 움직임, 그리고 일상 속 평범한 장면이 지니는 드라마틱한 본질을 포착하는 데 능숙했다. 그의 그림은 종종 따뜻하고 생동감 있으며,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투영하는 듯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와 소설, 특히 《닥터 지바고》에는 이러한 '화가의 시선'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의 문장은 단순히 사건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 시각적 이미지와 감각적인 디테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은

아버지 레오니트의 시선처럼 선명했다."

보리스는 종종 자연의 풍경, 도시의 변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마치 화폭에 빛과 색채를 입히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레오니트가 드로잉을 통해 순간을 붙잡았듯이, 보리스는 단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감정의 날카로운 스냅샷을 찍어냈다.

III. 비극적 단절: 혁명과 망명

레오니트가 아들에게 끼친 가장 크고 비극적인 영향은 ‘단절된 유산’이다. 러시아 혁명(1917년) 이후 볼셰비키 정권의 문화 정책은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21년, 레오니트는 눈 수술을 핑계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베를린으로 출국했다. 그는 다시는 조국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았고, 독일과 이후 영국 옥스퍼드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다.

보리스는 조국 러시아에 남았다. 이는 레오니트가 서구의 자유로운 환경을 택한 반면, 보리스는 러시아의 고통과 운명을 함께 짊어지기로 결심했음을 의미한다. 이 가족과의 단절은 보리스에게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그를 ‘순수한 러시아 문학의 마지막 계승자’로 만드는 시련이 되었다.

망명지에서 레오니트는 아들의 문학적 성공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그들의 교류는 편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45년 레오니트가 영국에서 사망하면서 부자간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IV. 레오니트의 유산: 지성과 생명력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는 보리스에게 '예술가로서의 삶의 방식'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포착하는 능력'을 물려주었다. 그의 집에서 누렸던 지적 자유와 활기찬 생명력은 보리스의 문학에 깊은 휴머니즘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보리스가 혁명의 혼란과 스탈린주의의 억압 속에서도 끝까지 개인의 존엄성과 예술의 자유를 옹호할 수 있었던 힘은, 아버지의 시대가 상징했던 러시아 지성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와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레오니트는 화가로서 그의 아들이 걸을 길을 간접적으로 비추어 준, 빛과 그림자를 모두 아우르는 위대한 유산이었다.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의 작품들
Self-portrait (before 1916)
아들 Boris Pasternak, 1901
The artist's daughters Lydia and Josephine in the nursery, 1908
Leonid Pasternak 의 삽화
Night before exams
News from the homeland
Boris Beside the Sea, 1910, oil on canvas
Portrait of a Woman (1893) by Leonid Osipovich Pasternak
Reading by the green lamp
The artist's daughters Lydia and Josephine, reading, 1916
Alexander Pushkin at the seashore
Leonid Pasternak's sons Boris (left) and Alexander (1900s)
Leonid Pasternak's children (1914)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가 1914년 결혼 25주년을 기념해 그린 아이들 모습. 왼쪽부터 보리스, 조세핀, 리디아, 알렉산더.
E. Levina, 1916, tempera and pastel on paper mounted on canvas
Conductor Vyacheslav Suk, 1898, oil on canvas
Rilke in Moscow, 1928
Leo Tolstoy
Under a Lamp (Leo Tolstoy in his Family Circle), 1902, pastel on paper
Albert Einstein, 1924, oil on canvas
Shaul Tchernichovsky, 1928, oil on canvas
Shaul Tchernichovsky, 1928, oil on canvas
The Moscow Kremlin in the March Sun, 1917, gouache on paper
L. Pasternak. Mieganti - Dailininko žmona (aliejus, 1891)
Arranging Flower by Leonid Osipovich Pastern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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